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이 유명한 시는 좌파적 연극이론가, 연출가, 시인으로도 활약했던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 1898~1956)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일부분이다. 브레히트는 우리나라에서 1987년 해금된 이래 민주화 열망과 사회 현실에 맞물려 대번에 유명해진 인물이다.
1980년대 문화운동에 나선 시민들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1941)’, ‘세츄안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 1943)',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사회여”라는 대사가 유명한 “갈릴레이의 삶(Leben des Galilei 1943)’ 등의 작품 이름만 들어도 향수에 젖을 지도 모른다.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전에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부르조아의 탐욕을 풍자와 해학으로 극화한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groschenoper 1928)로 일약 대가 반열에 올랐다.
브레히트는 1926년 그동안 천찬해오던 독창적인 연극론을 좀더 구체화하여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이론과 미학적으로 대립하는 ‘서사극 이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존 연극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관객이나 시청자들은 흔히 자기 역에 완전 몰입한 배우를 찬사한다. 더더구나 그 배우가 맡은 역이 자신의 현실과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감정이입도는 더더욱 강해진다. 종종 배우와의 완전 동일시가 이뤄진다. 베르톨트는 이때 관객의 마음 속에 공백 지대가 생긴다고 보았다. 그래서 연극 스토리와 극중 배우에 대한 비판 의식의 마비를 불러온다고 보았다.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지성파 거장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쟝 폴 벨몽도가 차를 타고 가면서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보조석에 탄 애인이 지금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냐고 묻자 폴은 뒤를 슬쩍 돌아보며 ‘카메라’에게 하는 대사라고 대답한다.
폴은 자신이 지금 카메라를 뒤에 두고 연기하고 있음을 관객에게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낯선 미학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영화적으로 구현된 소외/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로서 브레히트표가 붙은 특허다. 브레히트는 연극 안에 각종 소외/소격효과를 삽입하여 관객이 연극을 감상하면서 비판적인 각성에 눈이 뜨기를 바랐다.
1986년 전 문화부장관 김명곤의 '아리랑’을 창단공연으로 고유의 연극색으로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극단<아리랑>(대표 권태원)은 제28회 정기공연작으로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이란 작품을 대학로 전용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극의 원제는 <아르뚜르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 1947)란 제목을 붙힌 브레히트의 ‘우화극’이다.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권력관계로 엮여 있다’는 미셸 푸코의 말이 떠올랐다는 연출가 김수진 씨는 김명곤 대표시절부터 10여 년 간 조연출 경험을 쌓아왔다고 한다.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에서 깔끔한 솜씨를 선보인다.
브레히트의 원작을 번역한 김미혜 교수(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의 해설에 따르면 이 연극의 스토리는 미국 갱단 두목 알 카포네(Al Capone)의 전기 '알 카포네 : 자수성가한 사람의 전기'의 세밀한 부분까지 모방했음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한 마디로 조폭 연극이 된다. 달수라는 이름의 폭력배가 오직 ‘맨손의 신념’ 하나로 경상도의 배추가 특산물인 한 도시에서 어둠의 권좌에 오른다는 줄거리다.
이 연극의 처음 빈 무대에는 나무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허름한 운동복 차림의 달수가 나와서 무대 중앙의 의자에 다가가서 만져도 보고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급기야 냄새를 맡는 무언의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이어서 무대의 입구에서 등장인물들이 총출연하여 네 발로 기어나오며 의자로 다가간다. 이어 권좌를 둘러싼 다툼이 현대무용을 연상케 하는 동작으로 그려진다. 물론 의자에 오르는 것은 달수다.
연극 초반에 무언극 형식으로 줄거리를 압축해서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작품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갖게 하지 않으려는 연출 의도로 보인다.
연극 초반부에 구부정하게 연기하던 달수는 서서히 배우 수업을 통해서 그럴싸한 대장부의 용모를 지니게 된다. 사치스런 옷을 입게 되고, 배추 조합원들을 상대로 한 연설 솜씨도 훌륭해진다. 달수는 권좌에 다가갈수록 외양적인 품격을 갖추게 된다.

달수는 마침내 최하의 밑바닥 인생에서 타인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물론 달수다. 그러나 이 연극은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달수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과정, 곧 달수와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의 변화’가 명확하게 제시됐기 때문이다. 자칫 심리적인 원인론으로 전락할 인간의 보편적인 권력욕의 성장과 몰락의 문제를 이 연극은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극이 끝날 무렵에 나온 해설자(김경미)는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저지 가능했던, 저지 가능한, 저지 가능할 달수의 상승은 우리의 굴종과 비겁함 때문입니다."
1시간 30분 동안에 달수를 제외하곤 다양한 역들을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성실하고 진지했다. 달수역을 맡은 한동규의 연기는 안정적이었다. 배우 지중호는 달수 조직의 모사꾼, 배우, 배추조합이사 역을 거뜬히 소화해내어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제17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다. 정치 권력의 속성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연극을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