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변 가로수, 무덤가 붓꽃 가물거리는 마을
국도변 가로수, 무덤가 붓꽃 가물거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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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네미 마을의 기억 1



나에게도 안식년이 있었던가? 야업의 필경은 고단하고 자동차는 무서웠다. 동해바다 쇠뫼 기슭 수구네미 마을로 거처를 옮기고, 신문도 없는 시간, 전파 영상도 없는 시간, 여섯 계절을 살았다.

<세찬 빗줄기>

모라기가 몰아친 뒤 매지구름이 머리를 덮더니, 비가 내린다. 얼마 만인가? 한 달포째, 이처럼 아주 많은 비가 내릴 때 빗줄기는 뿌우옇게 보이지 않고 그저 땅이 하늘의 빗줄기를 고즈넉이 받아들인다.

대지는 숨소리조차 멎었다. 석달 전 식구가 된 누렁이가 오이밭 옆에 지어준 제 집에 들어가 귀를 접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문을 닫아도 내가 빗속에 있고 비는 내 속에 있다. 나도 빗줄기를 따라 천지 속에 깊이 스며든다.

<국도변 가로수>

지난 가을에 심었다. 국도변 가로수들. 세 개의 받침대가 아직 검은 고무줄 끈에 묶여있다. 나뭇잎이 성글다. 우듬지와 가지가 잘려진 나무. 겨울 눈보라를 맞았고, 올 여름 태풍도 겪는구나.

아스팔트 밑에 뿌리를 내려야 하겠지!

나는 흔들거리는 네 몸뚱이를 저 받침대만큼도 부축하지 못한다. 매연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 같은 가로수. 네 앞으로 자동차가 사납게 질주한다.

<무덤가의 붓꽃>

수구네미 이 마을. 이삼십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바닷가 마을은 언제나 황량하다.

어부들은 저녁에 내린 그물을 아침 일찍 거둔다. 아낙네들이 읍내로 고무함지에 고기를 이고 팔러 가면, 마을은 빈 것 같다.

이따금씩 무료한 사람들이 소주병과 과자봉지와 담배를 파는 보잘것없는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그 가게 앞에 거기가 무덤인지도 모를 만큼 평토가 되어가는 무덤이있다. 어제 오전, 반장 일을 같이 보는 가게 주인에게 이장 모곡값을 전해주러 들렀다가 무덤 둘레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붓꽃을 보았다.

곤고했던 사람. 평생을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다가 죽어 절손이 되어 여기 묻힌 사람의 뼈와 살은 이제 진토가 되었으리. 누구 하나 풀을 베는 사람조차 없는 잡초가 덮인 그 무덤. 그 무덤의 초여름 청자색 꽃들이 마을 아이들을 불러모아 아이들이 붓꽃이 피어있는 무덤가에 뛰놀고 있다.

나는 붓꽃을 본 적이 이번만이 아니다. 그러나 황량한 바닷가 마을 무덤에 핀 잉크빛 붓꽃은 네 마음에 쓸쓸한 이야기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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