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리메이크 욕구'를 끄는 일본 영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 후반부터 세계영화계에 일기 시작한 '최대의 이슈'라면, 단연 '아시아 영화'의 약진일 것이다. 물론 지난 세기 동안 구로자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호금전, 사트지야트 레이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서구 영화계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는 어찌보면 '영화평론가' 혹은 '영화매니아'들의 아이템에 속했을 뿐, 강력한 문화적/사회적 영향력을 떨쳤다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군웅할거, 일본, 중국, 홍콩, 한국, 태국, 인도 등지의 영화들이 일제히 전세계를 향해 포화를 올렸으며, 이 영화들은 헐리우드는 물론 전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리메이크되고, 이들 국가에서 인정받은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제작의 메카 헐리우드로 차례로 입성하는 대쾌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열풍'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기묘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바로, 문화적 영향력과 흡수력의 한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을 법한 '헐리우드 리메이크'가 그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영화들 중 유독 일본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왜 이런 현상, 도저히 근거를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영화는 헐리우드 리메이크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어찌보면 오우삼이나 이안 등의 중국계 감독들이 '뜨고', 수많은 한국 상업영화들이 헐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을 팔았으면서도, 정작 '리메이크'만큼은 일본 영화가 선호되는 까닭으로, 헐리우드의 '선경험성'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헐리우드에서 가장 먼저 리메이크 작업에 들어갔던 영화는 다름아닌 일본 영화였다. 그 최초의 예로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전설적인 사무라이 에픽 '7인의 사무라이'('54)를 웨스턴으로 치환하여 리메이크한 존 스터지스 감독의 '황야의 7인'('60)을 들 수 있고, 이어 4년 뒤에는 마틴 리트 감독이 역시 구로자와의 클래식인 '라쇼몽'('50)을 각색, '아웃레이지'('64)라는 작품으로 번안한 바 있으며, 그 유명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황야의 무법자'('64) 역시 구로자와의 '요짐보'('61)를 번안한 작품이다. 이 시기에 대한 이해로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급작스럽게 전세계 영화계의 '화두'로 떠오르게 된 충격을 헐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이 '인정'하게 된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이후 일본 영화는 물론이고 아시아 영화 전체가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고, 결국 '일본 영화가 리메이크되었다'는 식의 인식이 아닌,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가 리메이크되었다'는, 한 영화작가에 대한 존경과 인정으로써만 헐리우드에 각인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처럼 '전례없는 일'이 이미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적어도 '황야의 7인'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도 모종의 웨스턴 클래식으로 여겨질 만한 톡톡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등에서,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이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의 대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이 굳이 '모험'에 속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예상을 해 볼 수 있다.
왜 '홍콩 영화'는 리메이크되지 못했나?
1990년 초반, '아시아 영화 대폭발'의 징후는 홍콩 영화에서 비롯되었다. 그간 '이소룡 영화가 만들어진 나라' 정도로만 서구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던 홍콩 영화는 1980년대 초반, 새롭게 떠오른 쿵푸 스타인 성룡을 데리고 다시 한번 '이소룡의 신화'를 이룩해 볼 채비를 갖추었으나 이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 원인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먼저 미국의 1980년대는 자국의 '싸구려 문화'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던 시기여서 타국의 엔터테인먼트에 일반 대중들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시기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또 결국 성룡도 '또다른 쿵푸 스타' 정도의 이미지로만 비춰져 '이소룡의 아류' 정도로만 치부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 실제로 성룡이 미국 시장 진출을 꾀한 '배틀크리크'('80)나 '프로텍터'('85) 등은 성룡 특유의 개그 감각이 다분히 제어되어 있는 영화들이었다.
그러나 1986년, '영웅본색'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던 세칭 '홍콩 느와르'는 서구인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장르였다. 쿵푸 영화를 통해 시도했던 과장미를 필름 느와르 형식에 접목시켜, 과장된 동작과 과장된 감정, 과장된 액션씬으로 범벅을 만들어낸 이들 '홍콩 느와르' 장르는 곧바로 미국의 청소년층과 매니아층에 흡수되어 최고의 인기 아이템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헐리우드는 마침내 '하드 타겟'('93)을 통해 '영웅본색'의 감독인 오우삼을 헐리우드로 부르고, 이어 임영동과 서극, 우인태 등을 차례로 불러들여 헐리우드가 공식적으로 '홍콩 영화 스타일'을 미국 대중들을 새롭게 매료시킬 '아이템'으로 삼았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웅본색'의 스타인 주윤발마저도 '리플레이스먼트 킬러'('98)와 함께 헐리우드에 입성시켰다.
이쯤에서 들 수 있는 생각은, 분명 1990년대에 헐리우드는 일본 영화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오직 홍콩 영화 '마력'에 빠져있었음이 분명한데, 왜 '리메이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의문은, 사실 이유가 분명하다. 헐리우드는 홍콩 영화를 굳이 리메이크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홍콩 영화는 리메이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야기'의 매력을 충분히 보유했던 영화들이 아니라, 연출의 '스타일'이 실팍한 내러티브를 압도해 버리는 스타일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일'만을 위해서라면, 실제로 헐리우드가 행했듯 '스타일의 창조자'들을 헐리우드로 직접 불러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게 하면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 결국 '리메이크'란 '흥미로운 영화'가 아닌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를 만났을 때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며, 세계영화계의 '비쥬얼 스타일리스트'들의 영화가 리메이크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증명될 수 있다.
'이야기거리', 과연 일본 영화에는 충만한가
현재의 일본 영화 헐리우드 리메이크 붐의 실체는, 쉽게 파악할 수 있듯 '호러 영화'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 영화가 늘상 자랑해오던, 그러나 오랜기간 동안 그닥 '잘 먹혀' 들어가진 않았던 이 호러 장르에 서구인들이 새롭게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카다 히데오의 '링'('97)으로부터 시작된 '뉴웨이브 호러'가 등장한 이후부터였다.
여기서 모종의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일본 호러 영화 역시 홍콩 느와르의 경우와 그닥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일본 호러 영화 특유의 연출방식이 고수되어 있고, '내용'보다는 '만드는 방식'에 더욱 집중되어 있는 것이기에, 홍콩 느와르 감독들의 경우처럼 해당 감독을 헐리우드로 불렀으면 불렀지, 굳이 리메이크까지 시도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1990년 중후반, 헐리우드에 불어닥친 기괴한 종류의 '다문화주의'에서 명확한 반론을 제기받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헐리우드 영화작가들은 '당연한 듯'이 전세계의 특출난 상업영화들을 비디오로 지켜보게 되었고, 일반 대중들 또한 이 영화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링'의 리메이크작이 미국 내 2000여개 극장에 걸리 이전부터, 미국의 영화관계자들과 영화팬들은 이미 '일본 호러' 영화들에 사정없이 빠져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카다 히데오를 필두로 한 일본 호러 영화 작가들의 '스타일'은 헐리우드 감독들에게 짙은 영향을 끼쳐 많은 '일본 호러 영화 스타일' 연출이 헐리우드 내에서 횡행하고 있었고, 이 '대박의 기미'를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까지 번지게 할 블록버스터 '링' 리메이크가 등장하자,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가 터져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중요한 점은, '한 번의 성공'은 그대로 경험론에 지극히 기대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제작자들에게 '보장'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번져나간다는 사실이다. 지금 헐리우드에선 '링2'의 리메이크는 물론, '주온', '회로', '카오스' 등의 일본산 호러/스릴러 영화들이 속속 리메이크에 들어가고 있고, 이 '붐'에 힘입어 호러 장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수오 마사유키의 '쉘 위 댄스'까지도 리차드 기어, 제니퍼 로페즈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어 개봉일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거리의 중요성' 따윈 이미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일본 영화 리메이크는 된다, 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게 된 헐리우드는, 앞으로도 한동안 일본 영화가 던져주는 매력에 깊숙이 빠져들게 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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