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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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문둥이에게 내린 린치



이 무슨 야바우인가. 당국이 본격수사에 착수하겠다던 바로 이튿날인 1953년 11월 21일,이성주(李成株)내무부 치안국장은 한하운이 좌익이 아니라고 언명한다.

그 사흘 뒤(11.24) 치안국은 한하운사건 조사 경위를 밝혔는데 당시 거의 모든 신문들이 그 발표 요지를 기사화 했으나 <<서울신문>>은 침묵하고 있다. 두 간부의 사직 사유가 관계당국에 의하여 부당했음이 밝혀진 찰라였던지라 차마 그 기사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으로 냉정했던 <<동아일보>>(53.11.25)는 수사발표를 두가지로 요약 정리해 준다. 그 첫째는 한하운의 가공 인물론으로 이 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하운 시초>>를 낸 장본인으로 밝혀졌다고 해명하며 참고로 본명이 한태영(韓泰永)인 그의 간략한 생애와 시창작의 계기를 밝힌다. 두 번째 수사의 초점은 바로 시 <데모>에 모아졌음이 드러난다.

원작에 있던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는 연과, “4련 둘째줄에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이란 구절이 말썽이었다. 특히 ”핏빛 깃발“은 바로 <적기가>를 연상하는 대목으로 수사의 초점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이 대목에서 한하운은 자신의 원작엔 그런 구절이 없었는데 편자(이병철)가 임의로 고친 것이라 발뺌했다고 전한다. 수사당국은 이 시인의 진술을 믿지도 부인하지도 않은 체 계속 조사하겠다고만 밝혔으나, 이제 한하운이 가고 없는 터라 그 진위는 가릴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데모>의 원작이 이미 1949년 월간 <<신천지>>에 실렸었고, 그게 다시 첫 시집 <<한하운 시초>>에 게재되었으며, 그로부터 4년 뒤에 재판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자신의 작품에 무관심한대도 만약 그게 원작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었을 터이다.

다만 이 문제의 시 한 편이 매카시즘의 세례를 받은 뒤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55년 시인 박거영이 경영하던 인간사에서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낸 이듬해 6월 15일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한하운 시전집>>을 냈는데,여기서 시 <데모>는 원작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즉 위의 원작에 있던 구절을 삭제 해버린 한편 끝 구절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를 “지나가고”로 고친다.

이어 맨끝에다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를 첨부했는데, 이 구절이야말로 당시 그가 겪었던 설음을 한마디로 토해 낸 아픔의 부피를 전해준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자유대한’에서 살아가는데 부족함을 느꼈던지 시 말미에다 ”註 ooo(1946. 3. 13일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고 조심스럽게 사족을 달고 있다.

그렇다고 한하운의 불안의식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1960년 8월 15일 신흥출판사 간행 자작시 해설 <<황토길>>에서 그는 <데모>의 배경이었던 함흥시절을 조목조목 풀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매카시즘의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후 시집부터 시 뒤에 붙었던 <주>항목이 부제로 승진하여 앞머리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시 <데모>는 원상복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하운의 문둥이의 서러움이 단순한 그 자신만의 아픔이 아니라 모든 나환자의 고통임을,아니 문둥이처럼 버림받은 국민대중의 아픔임을 밝혀주는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를 ‘빨갱이’로 몰아 세웠던 언론은 관계당국의 수사 발표 뒤 어떻게 했을까. <<평화신문>>은 한하운이 방문하여 “병신인 나를 더 괴롭게 하는 의도를 알고 싶다고 전제하며” 그 자신이 이병철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다고 말했다고 쓰면서도, 시종 이런 변명이 자기가 쓰고도 월북하고 없는 이병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를 조사 중이라고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바로 한하운으로 하여금 <데모>의 원작을 훼손시키게 한 요인이다. 누군들 1953년 휴전 직후의 매카시즘 체제 아래서 이보다 더 말끔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양심의 문둥이들이 육체의 문둥이에게 내린 린치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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