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에 초생달 비스듬히 걸려 있을 자정 무렵
민통선에 초생달 비스듬히 걸려 있을 자정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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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형! 낮은 곳을 보십시오 2

김대중 당의 멍에를 쓰고 영남에서 두 번이나 출마하며 정권교체를 향하여 표를 모았으나 국회입성에는 좌절을 당했지요. 후일 정권이 교체가 되고 난 뒤 우리에게 돌아온 건 상처 입은 영욕이었습니다. 나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난후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며 빚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탁하기 싫었고 이제는 경제활동으로 남을 도우며 살리라 결심했었던 것이죠. 그러나 빚을 내어 시작한 나의 경제활동은 판판히 깨어졌고 사업이란 것이 내 자신만 잘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아무리 성실히 일하여도 측근들이 불량하면 사업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는 멸치배 사업 등을 펼쳤지만 결국 먼 친척 인맥들에 의하여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하여 나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권력의 구석구석에는 아는 사람들투성이였고 그들이 황금빛 날개를 퍼득이며 곁에 있었지만 내 사업이 잘못된 이상 그들에게 구조요청도 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그들도 썩어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맥없이 1990년대를 영욕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민통선마을에 폐가가 있다하여 그 폐가를 빌려 수리한 후 문학관으로 쓸려고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폐가를 깨끗이 수리한 후 동료 문인들과 시낭송회도 열고 세미나도 열었으며 막걸리 한잔의 가무 장소로도 활용하였습니다. 즉, 문인 별장이었지요.

어려운 중이었지만 언젠가는 <대하소설> 한 질 쯤은 꼭 이곳에서 써 내리라 하고 집필처로 이곳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이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기진맥진하여 이 민통선의 <문인별장>에 홀로 들어와 잠을 잤습니다.

머리 아픈 일만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와 은둔하다 시피하다 밖으로 나가곤 했었던 때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 민통선에 초생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을 자정 무렵, 나는 문득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슴속으로 물결쳐오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 내 길은 이 길이 아니다 , 너는 버려야 산다>였습니다. 아 , 아 나는 그때서야 내가 20여 년 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길을 가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나는 신학교 졸업 후 <빈민목회> 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빈민목회만이 참 목회로 생각하였으며 결국 그 힘든 여정을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을까에 번민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저는 그 길을 포기하고 말았었지요. P형! 왜 그랬을까요, 왜 포기해야만 했을까요. 결국 자신감의 상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그 길을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지요. 그렇게 하기로 한 결정적인 동기는 빈민목회를 하며 고생을 하기도 싫었고 특히 군사정권을 저주하다시피 싫어했던 저로서는 당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더 좌절했던 게 아니었나싶습니다.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 쿠데타의 잘못됨을 말하고 저항해야 할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권력의 우두머리와 조찬기도회나 열며 그들의 만수무강과 안위를 위하여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들을 목격하고는 그만 두 손 두 발을 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던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한국기독교의 허상이었지 <인간 예수>의 실천적인 길은 아니었음을 깨달았지요. 그날 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롭게 나의 길을 걷기로 한 것 이지요. 세속에서 집착했던 명예도 물질도 사업도 사람도 모두 다 버리기로 했지요. 그리고 빈민목회의 길을 가기고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서서히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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