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남한강에서 삶과 사랑을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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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루엣으로 일렁이는 '남한강'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신경림 <목계장터> 모두



다가오는 세월은 잔주름만 남긴 채 또 다시 떠나가는 것

이 땅의 모든 산하를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활알활 불태우던 가을이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 저물어갈 때면 눈길 가는 곳마다 못 견디게 그리운 실루엣 하나 노을처럼 아스라이 가물거린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 실루엣은 살짝 스치는 바람에 온몸을 허공에 때구르르 구르는 낙엽이기도 하고, 저만치 물러서면 그 실루엣은 어느새 내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

머리와 어깨 위로 그 누군가의 오랜 절망처럼 툭툭 떨어지는 낙엽비가 몹시도 안쓰럽게 여겨지는 날. 깡소주 서너 병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갈대와 억새가 어우러져 떠나는 가을이 못내 아쉬워 온몸을 서럽게 서걱이고 있는 여주 남한강을 찾아 떠난다. 늦가을에 바라보는 강물과 강마을의 풍경은 어떠할까. 지금도 그 황포돛배 푸르른 강물 위를 떠돌고 있을까.

그때 그 나루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세월아 가라하고 황포돛배를 기다리던 그 방물장수들 지금도 가을햇살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을까. 그때 철새 몇 마리 그림처럼 날아가던 그 강변에서 억새와 갈대 몇 개 꺾어 머리에 꽂던 그 여자, 나만 바라보면 샐쭉이 웃으며 저만치 산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가던 그 여자, 지금도 억새와 갈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세월은 가고 오는 것.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아프고 슬펐던 기억들을 몽땅 데리고 한번 떠나간 세월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고, 또한 그래서 옛날은 늘 아름다운 것처럼 애타게 그리워지는 것. 고된 세상살이를 자근자근 깨물며 끝없이 다가오는 세월은 젊음도 삼키고, 검은 머리도 삼키고, 급기야 잔주름만 남긴 채 또 다시 떠나가는 것.

갈대밭과 억새밭으로 난 길을 따라 훌쩍이며 뛰어가던 그 여자

지난 달 29일(토) 오후 3시. '한국문학평화포럼'에서 개최한 '여주 남한강 농민문학축전'에 갔다가 오래 오래 바라본 남한강. 깊어가는 늦가을에 바라본 남한강의 푸르른 물빛은 마치 싯푸른 가을하늘에 진종일 매질을 당해 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도, 어린 날 아버지의 등짝에 나뭇짐 되어 업혀오던 억새도 모두 '속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나그네는 주머니에 든 깡소주 대신 여주 점동면에서 내놓은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며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남한강에 마음을 포옥 빠뜨렸다. 하지만 그때 나그네가 처음 이 강변으로 왔을 때, 깡소주만 홀짝홀짝 마시던 나그네를 원망스러이 지켜보다가 저만치 갈대밭과 억새밭으로 난 길을 따라 훌쩍이며 뛰어가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 여자는 서울 봉천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던 나그네에게 무엇을 바랐을까. 그때 그 여자는 꼭 한번도 '사랑해'라는 빈 말조차도 하지 않던 나그네가 그리도 원망스러웠을까. 그때 그 여자는 나그네와 결혼이라도 하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나그네 가슴 깊숙이 새겨져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명사가 되고 싶어 했을까.

그 여자가 훌쩍이며 뛰어간 그 길을 따라 나그네도 천천히 걸어본다. 푸르른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그 길목 곳곳에는 그때 그 여자가 머리에 꽂고 간 그 갈대와 억새가 그 여자에 대한 나그네의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처럼 서럽게 피어나 있다.

그때 그 여자가 납작한 돌을 집어 들어 물수제비를 날리던 그 자리에는 지금도 그 여자의 실루엣 같은 납작한 잔돌들이 여기저기 그리움의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황포돛배에 서서 다시 한번 내게 손을 흔들어 준다면

푸르른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의 끝자락 점동면은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 불리는 한강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주변은 조선시대 4대 나루터로 불렸던 마포와 광나루, 이포, 조포 가운데 이포와 조포 나루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도 신륵사 관광지 조포나루 황포돛대 선착장에 가면 옛 나루터에서 황포돛대를 탈 수가 있다.

누우런 포를 돛에 달고 바람의 힘에 따라 남한강의 푸르른 물 위를 미끄러지던 황포돛대. 황포돛대는 옛날 이쪽 마을과 강 건너 저쪽 마을의 쌀과 도자기 등 각종 물자를 실어 나르던 배였다. 지금은 12명이 정원인 황포돛배는 오늘도 조포와 영월, 여주 나루를 휘돌며 30분 정도 달린다. 어른은 뱃삯이 5000원이며, 어린이는 3000원을 받는다.

아, 지금 그 황포돛배가 나그네가 바라보는 이 강물 위를 천천히 달리고 있다면 차암 좋으련만. 그 황포돛배 위에, 그때 훌쩍이며 훌쩍이며 갈대밭과 억새밭 사이 난 길을 달려가던 그 여자가 서서 다시 한번 내게 손을 흔들어준다면 저 푸르른 강물에 몸을 풍덩 던져 헤엄을 쳐서라도 그 황포돛배로 다가가련만.

그래. 그 모든 것은 한낱 스쳐가는 꿈에 불과하다. 오래 전에 흘러간 것은 늘 아름다워 보이고, 앞으로 다가올 것은 늘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는가. 또한 지금 당장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다가온다고 해서 어쩌겠는가. 지금도 그때 그날처럼 저 푸르른 남한강 위에 애꿎은 물수제비만 날리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깡소주만 씹고 있지 않겠는가.

삶도 사랑도 곱게 지는 노을빛이 되어라

노을이 발갛게 물든, 저물어가는 가을 저녁에 바라보는 남한강은 더없이 아름답다. 노을에 포옥 빠진 푸르른 강물이 어느새 금빛 물결로 촐싹이기 시작한다. 금빛 물결을 바라보며 온몸을 마구 서걱이며 속으로 속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은 갈대밭과 억새밭도 지는 가을해를 물고 붉게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꿈길처럼 놓인 오솔길에는 그때 그 여자 같은 여학생 하나 잠겨 있다.

이윽고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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