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강마을의 쟁명한 햇살
낙동강 강마을의 쟁명한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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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1



존경하는 동년 일행 문우 여러분!

알다시피 우리는 해방이 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국권을 빼앗고 민족어를 말살하고 압제와 수탈을 일삼던 일제의 식민 통치는 너무나도 간악했기에, 그것이 종식되는 해방은 우리에게 벅찬 희망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어릴 때 부르는 이름으로 해방이 되었다 하여 ‘해수(解秀)’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아스라하고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초적 기억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어슴푸레한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르시는 바에 따르면 저의 출생 순간은 정오였다 합니다.

1945년 음력 5월 어느 날, 저는 제가 태어나던 그 시각 미처 뜨지 못한 제 눈꺼풀 사이로 창호지를 통해 비춰들던 낙동강 강마을의 쟁명한 햇살을 무의식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일제가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치던 그 시각, 고향과 조국의 산야는 피폐하기 그지없었으나 고향의 정오를 비추는 햇살은 눈부시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남달리 광명에 원초적 친화를 느낍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에게 비길 데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곧이어 닥친 동족상잔의 6.25는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습니다. 유년 시절, 무더운 여름날 시뻘건 불덩어리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비 오듯이 쏟아져 내리던 전란의 시간!

탱크가 부셔지고, 학교가 불타고 피 묻은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등불조차 밝힐 수 없는 암흑의 밤에 낙동강 밤하늘을 물들이던 포화의 잔영들! 우리에겐 아마도 이 같은 기억이 저마다의 뇌리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전란의 시간에 저는 혼자였습니다. 부모님은 조모님을 모시고 서울로 가셨고 저는 홀로 고향에 떨어졌습니다. 진보적 입장에 서 있었던 아버지와 월북으로 이어진 외갓집의 사상적 편향은 유년기에 있던 저를 고향에 홀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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