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17일, 한강 강변로에서 묘령의 한 여인이 피살 당했다. 정인숙이라고 밝혀진 이 여인의 죽음은 한국 정치사상 매우 드문 스캔들로 5.16 군부 집권증을 괴롭혔다. 대학가에서는 5월 축제 때 유행가 <눈물의 씨앗> 가사를 바꾼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000의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죽고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승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풍자노래가 즐겨 불렸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신민당 김상현 의원(현 국민회의)은 국회에서 정여인이 장관급 보증의 회수여권을 소지하게 된 경위,그녀가 접촉했다는 26명의 고관 명단, 외화 소지 경위 등에대한 규명을 요구했다. (이상 김삼웅 <<한국 필화사>> 참고).
세상은 흉흉할 때였다. 대통령 3선 개헌안을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27분 국회사상 최단시간인 단 6분만에 통과시킨 뒤인데다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1970.4.8)까지 있었던 터라 야당으로서는 호기였다.
이해 6월 1일자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제40호는 정당사상 처음으로 1면 전면에다 시를 한 편 실었다. 바로 김지하의 <<오적>>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민주전선>>은 2-3면에다 예의 정인숙 사건 관련 및 ‘현대판 아방궁 도둑촌’문제 등에 대한 국회발언 초록까지 게재했다. 바로 이튿날인 6월 2일 새벽 1시50분 경 관계당국은 신민당사 수색과기관지 10만7백부를 압수당했고, <<민주전선>> 출판국장은 연행 구속 되었다. 세칭 <<오적>> 사건은 이렇게 터졌다.
이때 김지하 시인은 어디 있었을까.
김시인은 이미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어찌된 연고인가 하면 <<오적>>이 실렸던 <<사상계>>1970년 5월호는 통상 4월 중순이면 나오는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애독되어 5천부가 매진되었고, 이 시의 통쾌함이 국회회에서까지 거론되자 관계기관은 얼른 시인을 연행해갔다. 당국은 발행인 부완혁과 잡지를 더 이상 시판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으며, 김시인도 일단 석방되었다.
그의 석방을 가장 반긴 것은 <<사상계>> 편집책임자 김승균(현 남북 민간교류 협의회 이사장)이었다. 문제가 되면 편집 책임자가 함께 구속될 것은 뻔했기에 김승균 편집장은 얼른 김시인을 현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어느 여관으로 피신케 했다가 곧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김시인의 보호자로 병원에 등록해 두고 자주 오갔던 김승균은 어느날 텅 빈 병실만 보게 되었고 드디어 그와 발행인 부완혁도 연행, <<오적>>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수사 당국은 시인과 발행인 및 편집책임자를 입건한다는 수사의 형평을 맞추고자 당시 신민당 유진산(기관지 발행인)총재도 조사하여 <<오적>> 사건은 다섯 고난자를 만들었다는 농담도 나왔다.
군부독재 시기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필화문학의 상징이 된 김지하 시인이 <<오적>>을 쓰게된 배경은 그 자신의 말처럼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겠지”(솔 출판사 전집 자료편)란 말이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 군부독재에 의한 개발정책은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시켜 ‘동빙고동 도둑촌’이란 술어는 이미 유행이었던 때였다.
1970년 3월 <<사상계>> 편집책임을 맡게 된 김승균은 당시 진보적인 문인들과 밀접한 사이로 4월호에다 <4.19혁명과 한국문학>이란 특집 좌담(참석자 구중서.김윤식.김현.김윤식)을 마련하여 리얼리즘논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4.19직후인 재학시절에 민족통일 전국 학생연맹 연락조직위원장직을 맡았던 운동권 출신이라 진작부터 김지하 시인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김승균 편집장은 김시인에게 즉각 오적촌에 대한 장시를 청탁했고, 이 천재시인은 불과 며칠만에 담시(譚詩) <<오적>>을 써왔다. 단숨에 읽고 난 편집장은 너무 기쁜 한편 행여 잡지사 내에서 게재 반대 의견이 나올 걸 염려해 슬그머니 부완혁 발행인 책상에다 올려두고 “아직 못 읽어 봤는데 먼저 보시고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시침을 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