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순수함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혁명가, 순수함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따뜻한 혁명의 문학이 되어 1



김예태시인님!

참으로 오랫만에 글이라는 것을 써봅니다. 그동안 써오던 자전집 원고도 멈춘 지가 2개월이 넘었습니다. 빨리 그 글을 써야 목회에도 도움이 되고 삶에도 도움이 되는데...... 글을 쓰지 않고는 갈증이 생기는 것 같은 삶이거늘 왜 이리 인생을 바쁘고 척박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동안 시인님께서 시론을 써 달라고 제게 바톤을 넘긴지도 꽤나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그 바톤을 잡은 것처럼 삶에 그늘이 지고 있습니다. 또 한번의 빚진 마음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민통선 산에는 이제, 뻐꾸기 ,소쩍새,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삶이 저처럼 생동감 있다면, 세상이 저처럼 정직하다면 시인들은 시론을 말하지 않겠지요. 저는 오랫동안 꿈꾸어온 문학에 대한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문학은 혁명가와 같은 열정이 있어야 된다고.......

혁명가는 정의로와야 하고 /혁명가는 불의보다는 선의의 삶을 택해야 하고/ 혁명가는 실천가여야 하고/ 혁명가는 자애로와야 하고/ 혁명가는 열정적이어야 하고/ 혁명가는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혁명가는 순수함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혁명가는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 박애의 실천, 사랑의 실천, 마치 로마의 폭정에 맞서 가난한자와 병든 자 미천한 자들의 삶의 그늘이 되어준 예수의 삶과 같은......

그렇습니다. 혁명가는 날카롭고 표독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적에 대한 모습이지 민중을 대하는 모습은 아니지요. 민중을 대하는 모습은 마냥 따스하고 자애롭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혁명을 한단 말인가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표정과 가슴은 마냥 따습기도 하지요. 마치 나사하나가 빠진 인간처럼 풀풀 날려가는 듯한 허술한 모습....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저는 이런 혁명가의 모습이 바로 문학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문학을 정신적, 외형적 사치의 도구쯤으로 여기고 얕은 우물에서 끌어낸 구정물과 같은 얕은 지식 수준밖에 안 되는 세치 머리, 세치 혀로 문학을 논하고, 맑은 정신과 역사성이 제로에 가까운 이가 자기 것의 잘남만 고집한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무지의 신념화>에 기초한 사람과 다를 바 없지요.

<허나, 문학을 하는 사람도 인간인데 어찌 100%의 혁명정신과 실천적인 인간이 되겠습니까? 허지만 시론만은 그렇다는 말이지요.

저도 혁명가의 시론을 얘기하지만 만분의 일도 실천을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허지만 혁명가의 바른 시론은 잘 알고 있으며 문학을 왜곡되게 하지는 않고 있지요. 그리고 그 몇 %의 실천을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이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