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의 한숨, '빱꾸디'가 되다
미륵의 한숨, '빱꾸디'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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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의 '빱꾸디와 암수바위'



땅에 갇힌 미륵의 고된 한숨
잔주름으로 또르르 말고 있는 바다

사람을 다스리지 못해
수평선 속으로 스르르 무너지는 쪽빛 하늘

다랭이밭 두덕에 사람의 아들 배고 엎어져
가쁜 숨 몰아쉬는 암미륵에 성이 난 숫미륵

덧없이 푸르른 하늘 향해
빳빳히 치켜드는 슬픔

언제냐
너와 내가 한 몸 되는 그날은

- 이소리, '암수바위' 모두

땡겨울에도 연초록 봄빛이 일렁거리는 섬마을

겨울이 제 아무리 깊어도 좀처럼 눈 구경하기가 힘든 따뜻한 남쪽나라 경남 남해. 남해대교를 지나 '빱꾸디'와 '암수바위'가 있는 가천 다랭이마을로 간다. 날씨가 흐리다. 늘상 유리빗살처럼 쏟아지는 겨울햇살에 은빛 윤슬을 톡톡 터트리고 있는 잔잔한 겨울바다는 희부연 안개 속에 제 모습을 감추었다.

눈빛에 담을 만하면 사라지고 눈빛을 돌리면 어느새 다가서는 짙푸른 수평선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뻗어나간 수평선을 허리띠로 삼아 바다를 철벅거리며 야트막한 산자락 곳곳에 청자빛 입술을 마주대던 푸르른 겨울하늘도 어디론가 숨었다. 오랜만에 짙푸른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으려던 나그네의 마음도 날씨처럼 우울하다.

바닷가 기암절벽을 끼고 꼬불꼬불 이어진 2차선 도로를 따라 남면 당항리를 지나 숙호해변에 들어서자 희부연 하늘이 갑자기 훤하게 벗겨지기 시작한다. 저만치 산비탈 곳곳에는 돌을 촘촘히 쌓아 만든 다랭이논들이 굴 껍데기처럼 빼곡히 박혀 있다. 굳이 가천 다랭이마을에 가지 않더라도 이 섬 곳곳에는 다랭이밭이 널려 있다.

턱이 얼얼할 정도로 맵찬 바닷바람이 불어대는 땡겨울인데도 다랭이밭 곳곳은 진초록빛으로 일렁거린다. 보리싹인가 싶어 다랭이밭으로 가까이 다가선다. 다랭이밭에서 진초록빛을 피워올리고 있는 것들은 보리싹이 아니라 모두 삐쭉하고 길게 튀어나온 마늘잎이다. 땡겨울에도 쑥쑥 자라는 마늘잎이 마치 이곳 섬사람들의 억센 삶의 의지를 빼박은 둣하다.

남해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

그래. 이곳 섬사람들은 비좁은 농토를 100% 활용하기 위해 벼를 베낸 늦가을에 마늘을 심고, 봄에 마늘을 거둬들인 뒤 다시 모를 심는 이모작을 한다고 했다. 하긴, 45도로 기울어진 산비탈 곳곳에 어렵사리 돌멩이를 촘촘촘 쌓아 만든 계단식의 비좁은 논을 겨울이라고 해서 어찌 가만이 놀릴 수 있겠는가.

숙호해변을 지나 바닷가 기암절벽을 낀 산비탈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가천 다랭이마을(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로 들어선다. 설흘산 자락, 한껏 기울어진 산비탈 곳곳에도 108층이 넘는 다랭이논들이 층층 계단을 이루고 있다. 한두 평 남짓한 크기의 아주 작은 논에서부터 300평이 넘는 큰 논에 이르기까지.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마을이 남해군에서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한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바다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이 마을에는 배가 한 척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곳 바닷가가 기암절벽이 많은 데다 바다가 너무 깊어 선착장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마을 사람들의 식의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해산물이 아니라 마늘과 벼다. 안내자료에 따르면 이 마을은 남해의 최남단에 있어 한겨울에도 눈을 구경하기 어려운 따뜻한 마을이다. 그런 까닭에 쑥과 시금치 등 봄나물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미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해풍의 영향으로 농작물의 병해충 발생률도 아주 낮다.

'빱꾸디'가 무언지 아십니까?

가천 다랭이마을이 친환경농업이 가능한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지금까지도 개울에 참게가 살고 있고 희귀식물인 얼레지와 용담이 눈에 흔히 띈다. 그리고 희귀새인 가마우지까지 이곳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하니, 이 마을은 하늘이 내려준 자연조건을 모두 갖춘 약속의 땅임에 틀림 없는 듯하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다. 지금의 '가천'(加川)이란 이름은 조선 중엽 때부터 불리워졌다고 한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때는 신라 신문왕 때로 어림짐작하고 있다. 또한 암수바위에 얽힌 미륵전설과 설흘산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 앞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3층의 돌 층계 위에 탑 장식 모양을 띤 반원 모양의 돌이 올려진 '빱꾸디'(밥구덩이)다. 마을 한가운데 돌탑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이 '빱꾸디'는 '밥무덤'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이 탑 가운데 뚫린 사긱 진 구멍 속에 밥을 묻어 풍년농사와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그날,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빱꾸디의 사각진 구멍 속에는 밥그릇 모양의 동그란 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마치 해마다 일년에 한번씩 동제를 올리는 이 신령스런 돌탑이 일년 내내 이 돌그릇 속에 든 쌀밥을 맛나게 먹으며, 이 마을사람들의 식의주 해결와 만수무강을 이루게 해달라는 듯이.



미륵부처님의 신통력이 깃들어 있다는 암수바위

빱꾸디를 지나 바닷가로 조금 더 내려가면 비탈진 언덕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뜨락이 하나 있다. 곳곳에 동백나무가 심어진 그곳에 이 마을사람들이 미륵바위라 부르는 암수바위가 몸에 흰 띠를 두른 채 나란히 서 있다. 그중 수바위는 마치 발기한 남성의 그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고, 암바위는 그 곁에 비스듬하게 드러누워 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이기도 한 이 암수바위는 예로부터 이 마을 아낙네들이 아기를 낳기 위해 싹싹 빌던, 미륵부처님의 영험이 깃들어 있다는 바위다. 이 마을사람들이 암수바위를 미륵바위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숫바위는 높이 5.8m, 둘레가 2.5m이며, 암바위는 높이 3.9m, 둘레 2.3m이다.

이 바위에 깃든 전설도 재미 있다. 안내자료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백여년 앞, 이 고을을 다스리던 원님(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지금 가천에 묻혀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짐승들이 나를 마구 짓밟고 다니니 내 몸이 몹시 고달프구나, 나를 찾아 모시면 이 고을에 좋은 일이 생기리라"라고 말했다.

그 꿈이 하도 신기하다고 여긴 고을 원님은 이튿날 아침, 장졸들을 이끌고 가천으로 가서 꿈속에서 보았던 그곳을 팠다. 그리고 기괴한 모양의 바위 둘이 나오자 그 바위를 일으켜 세워 미륵바위라 이름 짓고, 마을사람들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때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고을 아낙네들이 이 바위 앞에 와서 빌면 금세 아기가 생겼단다.

그곳에 옛 고향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난 해 12월 끝자락. 나그네는 남해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언제 찾아도 고향의 품 같은 남해의 겨울바다에 서서 지난 한 해를 꼼꼼하게 되돌이켜보고 다가오는 새해 새로운 뜻을 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천 다랭이마을에 들렀다. 가천 다랭이마을은 나그네가 남해에 올 때마다 꼬옥 둘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그네는 빱꾸디와 암수바위를 둘러본 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초라한 목로주점에 들어갔다. 자그마한 마당 여기저기에 동그란 탁자와 의자, 평상이 놓여있는 이 목로주점은 몇 해 앞, 남해 곳곳을 함께 여행했던 지인과 막걸리, 라면을 먹기 위해 잠시 들렀던 곳이다. 하지만 지인은 운전 땜에 라면만 먹었다.

그때 이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던 그 할머니는 그대로 있었다. 나그네가 "할머니, 저 아시겠어요?"하며 인사하자 할머니께서는 "어디서 본 듯도 한 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그네가 다시 "막걸리 한 병과 라면 하나 주세요, 그때에는 젊은 친구와 함께 시켰었는데"라고 말하자 할머니께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라면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확 트인 수평선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옛집 한 귀퉁이에는 도구통이 추억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저만치 부엌 안에는 지금까지도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하는, 시커멓게 그을린 아궁이도 보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40여 년 앞의 고향집으로 되돌아온 듯하다.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천 다랭이마을 사람들

깊어가는 겨울에 찾은 가천 다랭이마을. 옛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마을은 지금도 그 흔한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마을에 가면 확 트인 수평선에 눈을 맞추면서 농사체험을 직접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아름답고도 조용한 바닷가를 거닐며 세상의 묵은 때를 깨끗하게 씻어내기에 더없이 좋다.

하늘이 내려준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천 사람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랭이논을 삶의 주춧돌 삼아 느긋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가천 사람들. 가천 다랭이마을에 가면 야트막한 산과 다랭이논,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가 엿보인다. 가천 다랭이마을에 가면 대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과 우리의 오랜 전통과 넉넉한 인정이 살아있다.

그래. 이번 주말에는 가천 다랭이마을에 가서 은빛 윤슬 굴리는 겨울바다와 다랭이논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어보자. 우리의 오랜 전통 신앙이 새록새록 숨쉬는 빱꾸디와 암수바위 앞에 서서 지난 해 고된 세상사를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운 나를 찾아보자. 새해 활기 넘치는 새로운 소원을 빌어보자.

☞가는 길/ 1. 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하동 구례 쪽 남해고속도로-진교(하동)나들목-남해대교-남해읍 1024번 지방도-서면 대정리(좌회전)-남면 당항리-숙호해변-가천 다랑이마을 '빱꾸디, 암수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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