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퇴근하고 딸아이와 고향에 갔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하루 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듯 가벼워 기분이 좋았습니다. 휴일마다 쉬면 자주 고향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습니다.
추수가 끝난 창밖 들녘은 왠지 모를 쓸쓸해 보였습니다. 딸아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버스가 달려간 곳, 시골은 적막함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신 어머니는 대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저녁을 드시고 한참 TV 드라마에 빠져 있던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저희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가득 끓여놓고 얼른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어머니는 그동안 농사일 때문에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입술엔 부르튼 흔적이 선명하게 있었습니다.
딸아이와 셋이서 둘러앉아 제가 사온 순대와 호박죽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앉아 늦은 저녁을 먹어보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휴일 날 할 일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쌀쌀한 초겨울, 뜨끈한 온돌방에 누워 도란도란 어머니와 얘기를 밤 깊도록 나누다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를 위해 시원하고 얼큰한 동태국을 끓여 드리려 했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부랴부랴 피곤함을 달래며 일어나 보니 벌써 어머니는 동태국에다 장날 사다 놓은 갈치까지 맛있게 구워 놓고 들에 나가고 안계셨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상을 차리고 딸아이를 깨워 어머니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어머니는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하며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차려놓은 상 앞에서 셋이서 앉아 햅쌀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그 날의 할 일이란 남편이 도와줘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일이 있어 같이 오지 못하고 아침 일찍 전화한 남편에게 일찍 오라고 했지요. 점심때가 돼서야 남편은 왔고, 그 사이 어머니는 동네 결혼식에 들러 인사를 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궁금한 안부를 물으시고 어머니는 밭으로 가길 재촉(?)을 하셨습니다. 할 일이 있으니 얼른 가서 해 놓고 쉬고 싶으신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라 일한 준비를 하고, 들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과 저에게 무를 뽑고 일부는 땅 속에 저장하고, 나머지는 동치미 할 것, 그리고 또 몇 포대는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언니와 오빠들이 오면 한 포대씩 간편하게 줄 수 있도록 해놓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엔 뭐 무 뽑는 일이 힘들까 싶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전 흙을 털어내고, 무청을 잘라내서 좋은 것만을 골라 끈으로 묶어두고, 무는 크기대로 굵은 것은 포대에 담고 저장할 것을 골라 남편이 파 놓은 구덩이 옆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 무를 어머니는 구덩이에다 보기 좋게 가지런히 넣었습니다. 무슨 꽃단장이라도 하듯 가지런한 무를 보니 올 겨울 이것만 있으면 배부르고 든든하겠네, 싶었습니다.
이래저래 뒷정리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는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무는 무대로 한겨울 내내 우리네 식탁에서 여러모로 쓰일 것이며, 무청 역시 겨울의 별미로 입맛을 돋우어줄 재료가 되어주니 그깟 힘든 것쯤이야, 싶었습니다.
두 시간 가량을 무 월동 준비로 바빴습니다. 무 뽑는 일이 끝나니 어머니는 남은 배추 걱정을 벌써부터 하셨습니다. 작년에 배추를 뽑아야 된다며 저를 부르더니 올해는 배추 대신 무 뽑는 작업을 시키고 배추는 또 누굴 시키나, 생각을 깊이 하십니다.
해가 어스름 저물어 갔습니다. 리어카에 무와 채소를 가득 싣고 돌아왔습니다. 리어카를 남편이 힘겹게 끌었습니다. 딸아이가 밀고 어머니가 밀고, 저와 번갈아 가며 밀었습니다. 아직 땡겨울이라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어머니의 월동 준비는 시작되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동치미 담글 무들을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가득 담았습니다. 저희를 보내고 나머지 일을 해야 한다며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챙길 것이 많은 고향의 월동 준비. 어머니는 그 긴 겨울을 위해 오늘 하루도 바쁘십니다. 항아리마다 자식들에게 겨울 동안 나눠줄 것들을 채워 넣고 장독대를 쓸고 닦고 바쁘시지요. 그 마음이 담긴 것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어머니의 온기를 받아 더욱 따뜻한 사람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