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무소속 이회창 후보쪽으로 속속 이탈하면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인제 후보는 “홀로 간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단일화를 역전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정동영 후보의 앞날도 밝지 않다.
이 후보와의 단일화를 제쳐둔다 해도 문 후보와의 단일화에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 후보측은 “후보 단일화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단일화를 서둘러야 한다”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문 후보측은 “단일화에 대해 국민의 관심을 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후보 검증을 위한 토론회 개최 요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범진보진영의 모습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정몽준 의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를 영입하며 ‘대세 굳히기’에 들어간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단일화가 힘들 것”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단일화를 해도 큰 효과가 있겠냐”는 비관론도 고개를 치켜든다.
범진보개혁세력 단일화가 난항을 빚자 이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어르신이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DJ 어르신 나섰다
지난 4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7주년 기념행사장은 범진보개혁진영이 총결집한 자리였다. 이인제 후보가 빠지기는 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등 주요 대선후보와 신당 오충일 대표, 민주당 박상천 대표 등 주요 인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이와 함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 박광태 광주시장 등 동교동 인사들과 임채정 국회의장,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수 노동부장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정, 문 후보가 나란히 맞은편에 앉자 “둘이 앉으니 보기 좋다”고 말했다. 그동안 ‘문국현 후보까지 포함하는 후보단일화’를 주장했던 김 전 대통령의 의중이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본 것. 정치권은 이를 은근한 단일화 압박으로 풀이했다.
정 후보는 “대통령님 덕분에 이렇게 자리가 됐다. 걱정 안 끼쳐 드리게 잘 협력해서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문 후보도 미소로 답했다.
63빌딩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7주년 행사
정동영·문국현 대선후보, 오충일·박상천 대표 등 범여 결집?
정, 문 후보는 이날 서로 김 전 대통령의 눈에 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문 후보는 “젊을 때부터 계속 유한에 있었냐”며 관심을 표하는 김 전 대통령에게 “34년 동안 유한에서 일했다, 킴벌리클라크 북아시아 총회장을 역임했다. 홍업이(김 전 대통령 차남) ROTC 동기로 군 생활을 했다”며 개인적 친분을 강조했다.
문 후보보다 늦게 행사장에 도착한 정 후보는 “다음에는 청와대에서 모시겠다”고 말했다.
단일화 ‘同床多夢’ “힘겹네”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7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은 문국현 후보가 정 후보에게 단일화를 공식 제의한 날이기도 하다. 문 후보는 “16일까지 후보단일화 하자”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정 후보도 “하루라도 빨리 만나자”고 화답, 행사장에서 자연스런 만남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단일화는 시작부터 힘들게 전개되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은 안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놔 문 후보가 단일화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전국 방송 1회, 지역방송 5회 등 총 6회 TV토론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고비’라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다.
신당 민병두 전략기획본부장은 “‘이명박-이회창’, ‘권영길-타 후보’ 등 다른 후보자들에게도 TV토론 기회를 주는 대신 ‘정동영-문국현’ TV토론을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자”고 요청했다. 선관위 ‘단일화 TV토론 중계 금지’의 우회로를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민 본부장은 “문 후보쪽이 단일화 의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단일화 논의와 관련해 시민사회 인사들에게서 문 후보 태도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문 후보가 외면당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초 중재를 맡기로 했던 시민사회인사 9인모임도 “양당이 합의도 못하고, 문 후보쪽이 미합의사항에 대해서는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약속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중재에 나설 수 없다”며 중재 중단을 선언했다.
이인제 후보도 단일화에는 적극적이지 않다. 이 후보는 김 전 대통령의 행사 불참에 대해 “유세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범여권 단일화에 응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이유의 불참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이 후보는 범여권 후보단일화 시도에 대해 “원칙과 명분을 잃고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내세운 야합”이라고 비판한 뒤 “민주당 노선에 기반한 정권을 세우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며 대선 완주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몸집 커지는데 뜨질 않아
후보 간 단일화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지만 범진보진영의 결집에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박선숙 전 환경부 차관이 신당에 합류했으며 신국환 의원도 신당에 새 둥지를 틀었다. 국민연대 이수성 후보와의 단일화·연대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동영 ‘문국현 감싸안기’ 난항…이인제 독자행보 가속화
“‘이명박 대세론’에 치여 이대로 지리멸렬 하지는 않을 것”
한 정치분석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범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는 대선 최고의 변수였다. 하지만 이제 그 기운도 거의 소진한 상태”라며 “이제 ‘모이는’ 것 보다는 ‘뜨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단일화가 이뤄진다고 해도 민심을 뒤엎을 ‘태풍’이 될 수 없으면 그 효과는 미미하리라는 분석이다.
정치권의 시각도 이와 같다. 문 후보와 단일화를 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이인제, 이수성 후보 등 범진보진영의 대선후보들과 단일화를 성사시키겠다는 것이 정동영 후보측의 계산이지만 범진보진영의 지지율이 모두 모인다고 해도 30%에 미치지 못한다. 45~50%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이명박 후보에게서 역전을 거두기 위해서는 +α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기적 문제도 빼 놓을 수 없다. 대선은 19일이지만 부재자 투표는 13, 14일 실시된다. 단일화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늦어도 부재자 투표 전 단일화가 성사되어야 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이명박 후보의 독주를 가장 견제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범진보진영”이라며 “우왕좌왕 하는 듯 보이는 모습 뒤에는 ‘대세론’에 치여 이대로 지리멸렬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며 막판 단일화와 지지율 상승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