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학을 하고 시를 썼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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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2



내 고향 안동에는 삼이 잘 자랐습니다. 내 고향 여인네들은 낙동강 상류의 비옥한 땅에서 자란 삼으로 안동포라는 삼베를 짜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안동포를 짜는 여인네들의 한스러운 노래 가락을 익혔습니다. 전쟁으로 홀로된 여인들의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노래란 진실대고 참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고향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부모님을 따라 객지인 충청도로 옮겨 간 생활은 궁핍했습니다. 생존 기반이 박탈된 충청도의 생활은 소년시절 저에게 많은 기억을 심어주었으며 가족사적 비극은 자연스레 분단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습니다.

철도원이 되었던 저는 중앙선과 태백선과 충북선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고향을 떠나 탄광으로 오가던 기층민들의 애환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이상을 동경하던 순진무구한 청년시절 그들의 고통스런 모습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병역을 마치고 늦게 독문학을 공부하러 외국으로 떠난 유럽에서 저는 제도화된 서구사회의 민주주의와 복지를 통해 가난한 후진국 조국의 슬픔을 익혔고 인간의 꿈과 열망으로 이루어 낼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존경하는 동년 일행 문우 여러분! 우리는 왜 문학을 하고 시를 썼던 것일까요? 서양인들은 직업을 일컬어 ‘소명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승에서 어떤 소명을 받은 것일까요? 일찍이 프리드리히 휠더린은 ‘나는 모름지기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슬퍼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그의 시 <고향>에서 말했습니다.

서른두 살에 세상의 유랑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36년간 정신이상 증세로 비참하게 살다간 시인은 고향의 향토와 조국의 품에 영혼을 묻었는데 그가 남긴 말은 저에게도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광명을 사랑하고 밝음을 사랑하며 어둠을 슬퍼합니다.

압제에서 해방된 밝음과 광명, 제가 태어난 고향의 눈부신 햇살은 저에게 끝없는 친화로 다가오고 폭압과 학정과 압박은 영원한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삶이 문학을 태어나게 한다면 우리가 겪은 시대적 삶은 우리에게 끝없는 문학적 영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존경하는 동년 일행 문우 여러분! 시로 여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저에게 문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인간의 숭고한 열망이 문학의 다른 이름이라 여깁니다. 그것은 또한 광명을 사랑하고 밝음을 사랑하며 어둠을 혁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겐 진정 문학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에 태어남에 있어 생년이 같다는 것 말고도 그 수많은 직업 중에 하필 문학을 함께 하며, 그 문학 중에서도 시를 같이 써왔다는 깊은 유대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빌며 더욱 좋은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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