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있지 않은 여기 이 반짝이는 강변 소읍이 그의 진정한 삶의 무대는 아닐지언정, 그것은 분명히 자신에게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삶의 한 큰 요소임에는 틀림없는 듯했다.
"선생님, 안녕히 들어가세요."
먼데서 누군가가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목소리는 청아했고, 가라앉은 주변의 대기를 흔들면서 멀리서 울려왔다. 오미진 조교였다.
연구실을 나와 학과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나와 버렸더니, 그녀는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상냥한 태도에 청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도무지 구김살이 없는 아가씨이다. 그녀는 지금 서울의 모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오 조교는 대학 강단에의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교문을 벗어난 홍영희는 몸을 풀 듯이 편안한 자세로 학교 앞 잘 다듬어진 길을 걸었다. 길은 잘 포장되었으며, 길의 양옆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어서 시야가 탁 트이고 시원했다.
이 길을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대전으로 뻗은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 대로변 건너편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구릉이 있었고, 그 기슭에 홍영희 선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서 있었다. 대로는 대교를 지나 강 건너에 펼쳐져 있는 시가지로 이어진다. 대교라 하지만 시골의 들판의 흐르는 강물 위에 걸쳐진 철근 콘크리트 다리에 불과하다. 다만 강물이 직접 흘러가는 부분만을 무지개식 교각으로 버팀대를 쳐 놓았을 뿐이다.
홍영희 선생은 자신의 아파트 문에 키를 꽂았다. 그리고 우회전을 시켰다. 그것은 부드러운 금속성 음향을 내면서 풀어졌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자신은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말부부가 되면서까지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어폐가 있었다. 남편은 썩 유능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집안을 꾸려나갈 만하다. 그가 큰 사업가가 아닌데 더 윤택한 생활을 요구한다면 분명히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일까. 그것도 아닌 듯했다. 자신이 꼭 여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명예욕이 그렇게 강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가족에게 큰 불편과 고통, 그리고 고독을 안겨주는 이 짓을 왜 계속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자유, 꼭 행동의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사고와 상상력의 자유를 희구하고 싶었다. 대도시의 속물적인 환경과 사고에 젖으면 사고와 행동의 반경은 폐쇄적이 되고 이내 단절의 장벽 앞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무언가 사색하고 가만히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계속 움직이면서 생각의 기회를 빼앗기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다.
아파트 내부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3개월간 비워놓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꼭꼭 닫은 채 커튼을 쳐놓았기 때문에 통풍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홍 선생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름보일러의 스위치를 눌렀다.
위윙- 소리를 지르면서 기계는 이상 없이 작동했다. 지난 겨울 눈 내린 여기 강변 소읍을 떠날 때 오늘을 예측하고 보일러의 기름 탱크에 경유를 가득히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먼지 않은 거실을 지나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강물이 흘러가는 백사장이 눈앞에 잡힐 듯이 전개되었다. 구름처럼 펼쳐져 있는 긴 다리의 교각들이 마침 강의 수면으로부터 피어오른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아파트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인을 떠나보내 놓고 있던 방은 그녀를 말없이 받아들였지만, 역시 그것은 정겹고 포근했다. 홍 선생은 알 수 없는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