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에 문학청년 시절을 보낸 세대들에겐 헌 책방에서 정지용을 사라진 연인처럼 찾아 헤맸던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1949년 '문교부'에서 금지처분 시켰던 책들은 그때만 해도 불발탄처럼 방치된 채 여기저기 묻혀 있었다. 그리곤 1960년대의 별로 배울 것도 없었던 상아탑에서 다시 정지용을 만나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0용'이었다. 그의 책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했던 시절이라 짜릿한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고서점 주인과 흥정하던 그 쾌감.
흥정이란 일종의 정보 전쟁으로 월북하여 출세한 인물(예컨대 벽초. 민촌. 백남운 등)의 저서는 숙청 당해버린 인물(임화. 김남천 등)들의 것에 비하여 훨씬 비쌌고, 월북자는 납북자보다 더 비쌌는데(명백한 납북자는 남한에서 출판될 수 있었기 때문), 서점 주인이 낯선 이름 앞에서 그게 어떤 운명의 주인공인지 더듬거리면 싸구려로 구입할 수 있어 쾌재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정지용을 모르는 고서적상은 없어서 그의 책은 항상 고가였다.
'정0용'은 카프맹원이나 경향파는 아니었지만 '민족시인'이란 아득한 지평을 장식하는 거봉으로 문학사에 다가서서 어떤 분류나 틀 속에 가둘 수 없기에 그의 책값은 언제나 비쌌을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농투사니들의 땀에 절인 삶이 스민 누렁이토종인 이용악의 향수와는 달리 모더니즘적인 잡종기가 섞인 얼룩배기 황소같은 향수일망정 정지용의 시세계는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정감어린 언어로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집에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에세이집 <<산문>>(동지사 1949.1)이다. 쥐 오줌에 절인 종잇장이 흐느적거리는 책에서 그는 진정한 '순수문학'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연과 인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 문학에 간여하여 본 적이 없다.
오늘날 조선문학에 있어서 자연은 국토로 인사는 인민으로 규정된 것이다.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를 썼다. 그것이 시집이 되어 잘 팔리었을 뿐이다.
사춘기를 훨석(씬?) 지나서 부텀은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그런 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된 내력이다.
그러니까 나의 영향을 다소 받아온 젊은 사람들이 있다면 좋지 않은 영향이니 버리는 것이 좋을까 한다. (........)
정치와 문학을 절연시키려는 무모에서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나온다면 무릇 정치적 영향에서 초탈한 여하한 예술이 있었던가를 제시하여 보라.
<산문>, 에세이집 <<산문>> 31-32쪽.
무척 아끼고 싶은 구절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의 유신통치 시기 -- 강압 속에서 학계는 도리어 '한국학 붐'이 불붙어 이 분야의 책들이 헌 책방에 등장하기 무섭게 경쟁적으로 나꿔채가는 풍조여서 책값은 이사철 전세처럼 뛰어 올랐으나 정작 살만한 물건이 나오지 않아 약간의 스릴을 겸한 구입 경쟁이 언더적 수법으로 치열했다.
바로 그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처음 찾았던 게 1980년대 후반기였다. 아무런 표지도 없었던 을씨년스런 어느 늦가을이었는데, "넓은 벌"도, "실개천"도, "얼룩배기 황소"도 없는 그 황량한 소읍 변두리가 고향을 연상시켜 가슴 속으로 눈물을 묻었다.
근대 시문학사 최고봉의 한 시인의 생가가 이렇게 분해되어 가는구나! 마을 사람들은 관심도, 그 이름도 아랑곳 않고 꼬치꼬치 캐묻는 일행을 간첩 신고를 해얄지 말아얄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수상스럽게 빤히 쳐다봤다. 더욱 서글펐던 건 지척에 있는 장엄하게 치장된 육영수 여사의 생가였다.
그 뒤 몇 번인가 다녀오는 동안 민주화 바람을 타서 시인의 생가는 다듬어졌는데 웅휘하던 육여사의 친가는 폐허처럼 버림받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또 느꼈다. 어차피 역사적인 흔적인데 왜 정권과 함께 저렇게 버림받아야 할까.
호사를 뽐내선 안되지만 있던 그대로를 보전하는 건 마땅할 텐데 왜 우리는 이처럼 단견일까 싶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지용에겐 르네상스가 왔다. 생가 복원, 축제 등으로 그는 유명해졌고, 이젠 그곳엘 은밀히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부활했으니까. 우리 세대의 상당수는 이렇게 불법시대의 정지용을 짝사랑한 셈이다.
왜 이렇게 장황한 서론을 앞세우느냐면 부활한 정지용이 도리어 금지 시절의 정지용이 했던 만큼의 역할과 가치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어서이다. 왜 그가 <향수>의 '순수시인'으로 주형화된 채 토속적인 한 지역 잔치의 주역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투정이다. 정지용처럼 순결 진솔하게 민족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한 시인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은 게 아닌가.
저 탄압의 시대에 은밀하게 사랑했던 정지용은 우리 문단에서 계속되어온 순수. 참여 논쟁을 무색케 만드는, 그러면서도 우리 시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민족. 민주. 통일에의 열망으로 뭉쳐진, 그러고도 구호와 고함이 아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위대한 시인이 아닌가.
남북이 함께 김소월이나 이용악처럼 스스럼 없이 민족시인으로 추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의 하나일 수는 없는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고뇌로 보낸 뒤 8.15의 혼란 속에서 진정한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다가 희생된 투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