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양주와 고급 음식이 가득한 한 별장. 매혹적인 애인과 더불어 별빛 아래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상상만이라도 해보라 … 당신은 물론 결혼한 상태여야 한다.
매일 보고 또 보고 하는 지겨운 아내만 사라진다면 나승재(조준형)가 세운 주말 계획은 완벽하다.
승재가 초대한 손님은 아름다운 모델 김미선(이은정)과 소심한 친구 배용만(김정훈)이다. 잘 생겼지만 겁이 많은 용만보다 똑똑하고 남성답다고 자신하는 승재가 미선과 달콤한 밀애을 나누는 시간에 오로지 장애가 되는 존재는 아내 희진 뿐이다.
아마도 이게 공포극이라면 승재는 아내를 죽이거나 미친 여자로 만들어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아니라면 침실 바닥에 생매장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누구?>는 연인들이나 친구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한 연인 사이의 고르기우스의 매듭 만큼 복잡하게 얽힌 연애 ’를 다룬 희극이다. 이야기의 구성이 뛰어나 보고나면 초라해지는 허무류 연극은 아니다. 간혹 뛰어난 이야기의 짜임새는 주제의식을 넘어서기도 하는 법이다.

남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애인이 온다는 데 희진에게 친정집이 뭐 대수인가. 희진이 약속을 취소하기 시작하면서 승재, 희진, 용만, 미선, 화자(임영란) 다섯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열심히 극을 관람해도 뭔가 묘하게 아리송한 여운이 남는 한바탕 소동이 쉴새없이 벌어진다.
90년대 ‘섹스코메디’의 한 획을 그은 마르크 카몰레티의 ‘누가누구(Who's Who)’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 이른바 미학에서 ‘우월감웃음 이론’이라고 하는 것.
모델 미선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열망에 깜냥껏 잔머리를 썼던 승재가 갈수록 미선과 섹스하기 힘들어지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면서도 뭔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모습을 보며 관객의 마음이 오히려 훈훈해진다.

자기 아내와 바람을 피는 놈팽이는 죽여버리겠다며 얼음송곳으로 펜싱을 하는 바로 그 앞에 있는 친구 용만이를 의심 못하는 승재와 다른 캐릭터들의 사랑스런 약점들 때문에 연극을 보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다.
『누가 누구?』는 ‘어떤 결말이 나더라도 이 극에서 주인공들은 행복한 결말을 맺을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연극이다 .
치밀한 구성의 각본과 극의 템포감을 중시한 연출, 그리고 다섯 배우들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앙상블이 돋보인 『누가누구?』는 극단 <파도소리(대표 강기호)> 20주년 기획작품으로 12월31일까지 대학로 ‘세익스피어극장’에서 상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