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장식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는데... 나이를 먹으니 취미도 달라지더군요. 적당한 장식은 삶의 양념입니다. 옷도 우중충한 무채색보단 원색계열을 선호하고 밋밋한 벽에 작은 그림이라도, 진품을 복사한 포스터라도 걸고 싶더군요. 화병에 꽃도 꽂고... 자신이 사는 공간을 소중히 여기고 꾸미는 건 나쁜 일이 아니죠. 아무튼 전 변했어요. 변하는 중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라고 말하던 그 당돌한 시인 최영미(42)가 서른 잔치를 모두 끝내고 불혹의 나이에 훌쩍 접어든지 또 몇 해가 지났다. 그래, 최영미의 삼십대가 시의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때였다고 한다면 최영미의 40대는 시를 잠시 저만치 제쳐두고 그의 전공인 서양미술사 속을 파고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번의 허물벗기를 시도하고 있는 시인 최영미. 하지만 그의 이러한 허물벗기는 40대에 접어들면서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최영미는 이미 30대 후반인 1997년에 <시대의 우울>이란 서양미술사 이야기를 쓴 책을 펴냈다. 그는 이미 이 책을 낼 당시부터 곧 다가올 40대를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0대 후반에 낸 <시대의 우울>에 이어 40대에 접어든 최영미가 두 번째로 펴낸 서양미술사 이야기 <화가의 우연한 시선>. 고대 이집트의 초상 조각에서부터 1960년대 미국회화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어느날 문득 최영미의 시선이 닿은 뒤부터 자꾸만 최영미의 눈에 밟히는 그런 서양화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그 화가들의 삶에 대한 시인 특유의 감수성과 자잘한 비평이 담긴 그런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인 미술 비평서는 아니다. 말 그대로 시인 최영미가 오래 그림을 들여다 보면서 그림의 저 편에 숨어있는 새로운 세상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어내는 그런 미술에세이이다. 하지만 미술에세이라고 해서 미술작품을 보고 그 나름대로 떠오르는 잔잔한 감성만을 그려낸 그런 책도 아니다. 잘라 말하면 이 책은 비평서가 아닌 에세이이기도 하고, 에세이가 아닌 비평서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모두 21편의 미술에세이가 실린 이 책은 맨 처음 '권력의 얼굴-고대 이집트 <산우스레트 3세의 초상>'으로 시작하여 '어미에서 여신으로-기원전 2세기 그리스 <승리의 여신상>' '참회하는 손은 아름답다-도나텔로 <막달라의 마리아>' '누가 이 여자의 입을 지워버렸나-도미에 <세탁부>' '꽃보다 아름다운 꽃병-에밀 갈레 <목이 긴 병>' '사각형 속에 길을 잃다-에드워드 호퍼 <햇빛 속의 여인>' 등으로 수놓아져 있다.
그렇다면 최영미가 그림 저 너머 세상으로 들어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은 대체 어떤 것들이었을까. 최영미가 직접 짠 촘촘한 그물에 걸려 파닥이고 있는 그림 저 너머에 있는 그 세상 속을 슬쩍 엿보자.
<막달라의 마리아〉를 바라보는 최영미는 "여성성이 거세된 대신, 날개를 잃은 대신 그녀는 불멸을 얻었다"고 말한다. 또〈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는 "마치 화장한 것 같은 그리스도의 눈가, 슬픔으로 온통 파랗게 질린 성모 마리아의 옷섶을 지나 내 시선은 화면의 맨 앞에 엉거주춤 무릎 꿇고 앉은 천사에서 멈췄"고 "대담한 광선처리가 인상적" 이었으며 "분홍빛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목덜미와 어깨 등에 칠해진 바랜 듯한 파란빛은 어디서 온 걸까?" 라며 "여태까지 머리로만 이해했던 매너리즘의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목이 긴 병〉에서는 "우아한 선과 색채에 넋이 나간 나는 거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시끄럽고 너절한 일상을 떠나 사치와 고요에 푹 잠기고픈 유혹,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동경에 가슴이 뛰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내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누더기를 벗고 드레스를 입고픈, 완벽한 성장(盛裝)을 하고픈 신데렐라의 꿈이" 최영미 자신에게도 한때 있었다고 살짜기 고백한다.
<말하는 풍경>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취향은 옷에 대한 취향만큼이나 완고한 듯하지만 천천히 변해 왔"으며, 최근의 자신은 "모네나 터너의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이 좋"고 "전에는 달착지근하다고 멀리했던 편안함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은 결국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솔직함이 배어 있다.
"이집트의 초상 조각에서부터 1960년대 미국회화까지 서양미술사의 커다란 흐름들을 시대순으로 훑기는 했지만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닙니다... 유명한 누구의 어느 작품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지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우리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