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김미준)은 서른 두 살의 독신이다. 혼자서 푸줏간을 꾸려 나간다.
소정에겐 동거하는 한 사내가 있다. 이름은 태준(유하복). 일정한 직업 없는 뜨내기다. 언제 오마 말없이 왔다가 기약 없이 훌쩍 떠나기를 되풀이한다. 태준이 배라면, 소정은 기항지다. 그러나 태준은 이 기항지로 자꾸 되돌아온다.
그런 태준을 사랑하는 소정의 사랑은 과도하다. 태준이 찾아오면 ‘복어회’도 먹이고 비싼 시계와 화려한 외출복도 사준다. 만일 소정 주위엔 가족이나 친지가 있었다면 당장에 태준 같은 놈팽이는 만나지 말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터인데도 그러하다.
소정은 태준의 남성우월주의적 태도와 잦은 술주정, 오랄섹스를 해달라는 등 성적인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런 태준과 한 지붕 밑에서 풋풋한 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 태준은 소정의 바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푸줏간 일은 여성스럽지 않다며 구박하기 일쑤다. 그러다 성욕이 동하면 다시 소정의 치마 밑으로 달려들고…
소정은 태준에게 자기와 함께 푸줏간 일을 해나가자고 제안한다. 태준은 봉급이 적다며 거절하지만 진짜 이유는 여주인 밑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뜨내기 일꾼이란 처지는 괴로운 것이다. 그런 불안을 늘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태준에게 소정이 백수라고 말하면 화가 난다.

소정과 태준이 만날 무렵을 상상해 본다. 만일 소정이 태준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이 연극의 광고카피처럼 지독히 ‘나쁜 연애’는 성립하기 힘들었을까.
태준은 건장한 젊은이다. 일밖에 모르는 독신녀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성적 매력은 있는 사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습관적 사고를 반성할 줄 모르며 TV 보는 것을 소정의 일기 낭독보다 즐기는 사내다. 친구들을 만나서는 소정의 육체를 대상으로 음담패설이라도 능히 지껄일 사내다. 태준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섬세하지 못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내다.
여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소정이 이 따위 사내에게 끌리는 이유가 뭘까? 외로움이 골수에 사무쳐 이성이 마비됐단 말인가?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내에게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맥주 심부름까지 자청한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지 않다. 두 남녀는 ‘심수봉 디너쇼’에 갈 때 누가 돈을 지불할 것이냐, 외출복은 무엇을 입을 것이냐, 집에서 기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개의 처치 문제라든지 일기를 낭독할 테니 들어달라는 소정의 부탁에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기 일쑤다. 그러나 섹스를 하고 나면 잠시나마 서로 정다운 애인이 된다.
두 사람이 푸줏간이 아닌 다른 삶의 장소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 연극 끝날 때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진 않는다.
태준은 ‘더 나은 젊은 여자’가 생겼다며 떠나려 하지만, 이는 소정이의 적극적인 애정이 점점 부담스러워 이대로 가다간 부위별로 해체된 고깃덩이들이 가득한 푸줏간 뒷방에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괜히 지어낸 구실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태준이 떠나는 것으로 무대가 암전되나 곧 다시 불이 켜지면 태준은 골방에서 소정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을 것 같다. 소정은 기항지에 불과하지만 태준에게는 목적지로서의 항구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동물적인 외로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소정-태준의 관계의 핵심이다. 소정과 태준, 두 남녀는 서로 행복하게 해줄 때보다 서로 불행감을 느끼게 해줄 때가 많지만 서로 필요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서로 불행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야말로 두 남녀의 원초적 갈등을 해소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삶의 막막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태준과의 동거에 매달리지만 삐딱한 태준과의 이별과 만남이 잦아지면서 소정의 마음은 상처를 입고 공허감은 더욱 깊어진다. 이 연극은 외로움 때문에 짐승 같은 하층계급의 남자에 집착하는 독신녀의 '종생기(終生記)'다.
『추파를 던지다』,『소월』의 연출가 우현종은 <푸줏간 여인>이란 화폭에 서로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동거’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이어나가는 남녀의 애정 풍속도를 담담하게 그려놓았다.
특히 여성팬들의 관심과 갈채를 받고 있는 <푸줏간 여주인>은 극단 「추파」와 한강아트캠퍼니가 공동기획한 작품으로 12월31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상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