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옵니다
고맙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고맙습니다
땅이 흔들립니다
고맙습니다
아 아직
살아있는 지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땅이 흔들려도 늘 아직까지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근데 시인은 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하고 있는 것일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에게?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게?
아니다. 시인이 고맙다고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1989년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을 하다가 화물차와 충돌하고도 기어이 살아남은 자기 자신을 향한 고마움이다. 그래. 스스로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신이든 이 세상 모든 것에든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바람도 없는데 괜히
나뭇잎이 저리 흔들리는 것은
지구 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기 때문
-'사랑' 모두
이 시를 읽으면 문득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라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치 한용운의 "누구의 발자취입니까?"에 대해 "지구 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기 때문"이라고 화답이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우주는 스스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가 먼지 한 톨이라도 우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가 꽃 한 송이 떨어진 것은 또다른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함인가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는 연기법에 따른 것인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와 백년을 살다 죽은 사람의 가치는 같은가 우주 만물은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생명체인가" ('징검다리 111신' 몇 토막)
중증 장애 시인 최종진(46). 사고 이후 목 아래 쪽이 완전마비가 된 시인은 오늘도 노모(81)의 도움으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침대 위에 상을 펴놓고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을 꼼지락거려 마치 살아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시를 쓰고, 서툰 그림을 그리고, 소식지를 차근차근 만들어 나간다.
그의 작업은 마치 장인이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 예술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특히 1993년부터 지난 해 1월까지 10년에 걸쳐 펴낸 월간 소식지 <징검다리> 100호는 그에게 있어서 마치 팔만대장경판을 만드는 작업과도 같았을 것이다.
"누가 아프고 누가 슬프고 누가 화나고 하는 마음의 변화는 그것을 채워줄 또 하나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들이 서로 원을 그리며 세상을 돌립니다. 변화는 사랑을 믿으며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변하는 것은 사랑의 원리입니다." ('징검다리 100신' 몇 토막)
B5 용지 4장 분량의 소식지 <징검다리>는 최종진 시인 스스로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자 제작자이기도 하다. 이 소식지 1면에는 최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으며, 2~3면에는 후원자들의 후원내역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4면에는 자작시와 그가 읽었던 책에서 발췌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제 스스로 절망감을 떨쳐내고, 제 삶에 긴장감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또한 제 친구들과 주변 분들에게 제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랬다. 그가 펴내는 소식지 <징검다리>는 결국 그와 이 세상 사이의 길 트기였다. 그리고 그 길 트기를 통해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아내와의 이혼에 따른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죽는 날까지 소식지 발행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시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습니까?"
"1996년부터였지요. 사실 저는 예전부터 시와 소설을 몹시 좋아했어요. 하지만 한 번도 써보지는 않았지요."
"주로 어떤 내용을 시로 씁니까?"
"처음에는 제 자신의 외로움과 삶에 대한 고민을 극복하기 위해 시를 썼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빛깔이 어떤 색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종진 시인은 지난 해 9월, 3쇄까지 펴낸 첫 시집 <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꽃>(2001년 발간)에 신작시 15편을 추가해 모두 100편을 채운 개정판을 펴냈다. 그리고 처음에는 50부 가량 펴냈던 소식지 <징검다리>도 그동안 후원자가 조금씩 늘어나 지금은 250여 부를 펴내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시집을 펴낼 계획은 없습니까?"
"고맙습니다. 열심히 써야죠."
진종일 침대에 누워지내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최종진 시인. 시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새삼 조그만 일에도 분개하고, 조그만 어려움에도 모두를 잃은 것처럼 좌절하면서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모습이 절로 부끄러워진다.
중증 장애 시인 최종진은 1957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군의료보험조합에 근무하다가 1989년 1월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을 하던 도중 덤프트럭과 충돌, '경수손상'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시인은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 책읽기와 명상으로 지내다가 노모의 도움으로 왼손으로 시를 쓰기 시작, 1993년부터 소식지 <징검다리>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우리나라 처음이자 유일한 장애우 문학지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1년 첫 시집 <그리움 돌돌말아 피는 이슬꽃>을 펴냈다.
☞최종진 시인 연락처/경남 양산시 웅상읍 평산리 새진흥7차 아파트 201동107호 (055)364-2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