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순위는 암암리에 기업 자존심으로 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울러 박삼구 금호 회장과 조양호 한진 회장의 체면과도 무관치 않다. 수십년을 재계 앙숙으로 지내온 업체인 한진그룹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격돌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한통운 인수전 결과에 따라 재계서열 전격 재편될 전망
대우건설로 따라잡고 S-Oil로 도망간 두 기업의 자산 경쟁
현재 국내에 몇 안남은 메머드급 매물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바로 자산 1조5천억원 수준의 대한통운이 바로 그 중심이다. 이미 10여개 업체들이 인수의향을 밝히며 치열한 인수전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재계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은 지난 11일 대한통운 인수 의향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된 한진그룹이다.
그동안 대한통운 인수에 대해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적잖은 충격이 되는 셈이다. 한진그룹의 이 행보가 주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수년전부터 대한통운 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혀온 금호아시아나그룹(이하 금호아시아나)과 대한통운 인수전에서 정면에서 충돌한다는 점이다.
숙명의 라이벌 한진 VS 금호
사실 한진그룹과 금호아시아나의 악연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각각 국내를 대표하는 항공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그룹인 만큼 노선배분 등 수많은 안건에서 때론 감정싸움까지 벌여가며 대립해왔다.
한진그룹의 모태인 대한항공은 1969년 민영업체 한진상사에 인수되며 첫 민간항공기의 역사를 썼다. 대한항공이 공기업으로 20여년간 운영됐던 것을 감안하면 역사가 약 60년이 되는 셈이다.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1988년에 항공에 첫발을 딛었다. 역사에서 큰 차이가 벌어지는 만큼 규모, 매출량 등의 차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한항공을 바짝 추적하려는 아시아나항공의 의지는 여전하다. 아시아나항공의 지난해 순이익은 1천3백억원을 기록, 2005년에 비해 317%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대한항공의 성장률을 크게 압도한다. 물론 스코어는 대한항공이 아직 우위에 서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천8백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금호아시아나가 적잖은 파장을 재계에 던진 것도 지난해부터다. 지난해 11월 메머드급 매물로 재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대우건설 M&A를 성사시킨 것이다. 이 결과는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올 재계 순위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작년 11위(공기업·민영화된 공기업 제외)던 금호아시아나가 올해 7위로 네 계단 뛰어오르며 작년 7위이던 한진그룹을 8위로 밀어낸 것. 금호아시아나의 이런 수직상승은 작년 대우건설 인수에 성공, 자산이 9조원 이상 불어나 22조9천억원이 됐기 때문이다. 반면 한진은 1조5천억원 늘어나 22조2천억원에 그쳤다.
공정위가 발표하는 이 재계 순위는 청와대 오찬 등에서 자리 배치 기준이 되는 등 의전용으로 쓰인다. 즉, 회장의 자존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그룹 직원들의 사기와도 직결된다. 항공부문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재벌 회장이니만큼 자존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 한진그룹은 이를 염두한 듯 지난 3월 S-Oil의 자사주를 인수하며 다시 금호아시아나를 추월했다. 이로인해 현재 재계 순위는 한진그룹이 7위, 금호아시아나가 8위다. 불과 4개월의 짧은 추월이었던 셈이지만 이번의 대한통운 인수는 두 기업 사이에 또 다른 역전구도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회장 성격 빼닮은 인수전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은 활동적인 인물로 재계에 명망이 높다. 박 회장은 사업에 있어 진두진휘하는 리더십을 지향한다. 특유의 집념으로 운동이란 운동은 죄다 섭렵하며 체력을 키워왔다는 그는 최근 노선을 따낼 때도 직접 나서 열망하던 파리노선까지 얻어냈다. 그의 공격적인 행보는 이 대한통운 인수전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반면 항공업계 선두이자 조양호 회장은 보수적 경영자에 속한다. 격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결과 보다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타입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스타일이라면 조 회장은 말이 적고 핵심을 찌르는 스타일이다. 조 회장의 “시스템에서 움직이고 시스템으로 움직여라”는 어록도 개인에 의해 업무가 좌지우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조 회장의 리더십을 반영한다.
이에 이 두 회장의 성격은 대한통운 인수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는 평가다.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 인수 이후 대한통운 인수에 뛰어들며 공격적 경영을 보이고 있고 한진은 그동안 M&A시장에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막판에 뛰어들어 재계를 놀라게 했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런 결정에는 회장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며 “조용히 참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서는 스타일은 조 회장의 리더십이다”라고 평가했다.
실제 재계 일각에서는 한진그룹의 갑작스런 참가가 금호아시아나를 향한 대반격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박삼구 회장은 2년 전부터 “대한통운은 우리에게 여러 면에서 꼭 필요한 기업”이라며 인수의욕을 내비친 바 있다. 그런 와중 대한통운의 인수전이 막이 오르자 한진그룹 측에서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것은 공공연한 금호에 대한 도전장이라 것이다.
이에 한진 측 관계자는 “이번 인수참여 결정은 금호아시아나나 재계순위를 염두하지 않은 선택이다”면서 “육․해․공 분야에서 운송업을 하는 한진그룹의 대한통운 인수는 시너지효과가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의야 어쨌든 두 기업의 전장은 이제 대한통운의 주관사 메릴린치 목전으로 옮겨졌다. 대한통운 인수는 내년 1월4일까지 대한통운에 대한 예비 실사 작업을 벌인 뒤 1월11일까지 인수 제안서를 접수하고, 1월 중순께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2월 말이면 최종 인수자를 결정짓게 된다. 재계 전문가는 “수조원이나 오가는 인수전에 단순히 재계 순위 때문에 뛰어들지는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라이벌 경쟁하니 만큼 어떻게 해서든 지지 않으려고 총력을 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쟁 심한 M&A 시장이지만 라이벌 업체에 빼앗긴다면 그보다 큰 굴욕이 없다는 지적이다. 이미 10여개 기업이 참가하며 난전으로 흘러가는 대한통운 인수전. 이 속에서 라이벌의 한판 대결이 이들 관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