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의 삶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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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친일파가 아니다 2



정지용은 복권 후 다른 어떤 납월북 문인보다 대중화에 성공한 경우로 가히 범국민적인 애창시인으로 부상했대도 지나치지 않는데, 그건 이 시인이 지닌 문학성과 사회성이 두루 균형 잡힌 민족시인이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현상이다.

그의 생애나 연구 업적을 들출 필요는 없지만 최근 문제되고있는 일제 말기부터 8.15 직후에 이르는 시인의 삶과 시 <이토>만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39년 2월 <<문장>>지가 창간되었을 때 정지용은 38세, 한창 명성을 얻고 있었다. 휘문고보 1년 후배인 이태준과 함께 선고위원을 맡았던 정지용은 이 최후의 한글잡지에다 거의 매호 글을 발표하는 등 맹활약하다가 폐간(1941.4) 당하자 거의 절필하다시피 지냈다.

이런 문학적 대공황 속에서 그가 남긴 식민지 시기의 마지막 시가 <이토>로, 이 작품은 황도정신 앙양과 고취를 목적으로 1941년 11월 창간한 잡지 <<국민문학>> 1942년 2월호에 발표됐다.

이후 그는 절필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등에도 이름을 나타내지 않다가 1944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내려가 거기서 8.15를 맞은, 문인으로서는 흠 잡을 데 없는 암흑기의 삶을 보여준다. 그가 친일 시비에 휘말리게 만든 것은 두가지로, 첫째는 창씨개명이고, 둘째는 시 <이토>이다.

창씨개명 문제는 이미 김학동 교수가 <<정지용 연구>>에서 송강 정철파는 문중에서 송강(松江.마쓰에)을 성으로 썼으나, 정지용은 동이족(東夷族)인 우리 민족의 상징인 이(夷)자를 푼 대궁(大弓)을 성으로, 활 쏘는 기본 자세인 수(修)자를 붙여 대궁수(大弓修)로 개명했다고 밝혀주고 있다.

더구나 자녀들 이름에 조차도 활 쏠 때의 여러 행태를 뜻하는 이름을 부쳤다는 사실은 이 시인이 민족의식을 지니려고 얼마나 섬세한 고심을 했던가를 엿볼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문제의 시 <이토>도 이런 맥락으로 섬세 치밀하게 독해되어야 할 것인데, 그 전문은 이렇다.

낳아자란 곳 어디거나
묻힐데를 밀어나가쟈

꿈에서처럼 그립다하랴
따로 짖힌 고양이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제

피였다 꽃처럼 지고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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