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이 빛을 보지 못한 이유와 그 배경
국민이 정치에 대해 가장 환멸을 느낄 때가 정치인 스스로 소신을 저버릴 때일 것이다. 철새정치인을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자기 소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필 총재는 박정희 시절부터 공화당에 몸담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총리 등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당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재타도 유신반대를 외치는 야당의 중심인물이었다. 때문에 3김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종필은 '권력의 시녀'라는 꼬리표를 끝내 떼지 못하고 민주화를 맞이했다. 근근히 충청도 지역에 정치생명을 기반 하면서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나라의 정치판도는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치면서 지역주의의 심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정희-전두환이 경상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에 반대하는 김대중은 전라도에서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그 가운데 바로 김종필이 버티고 있었다. 전두환이 물러나면서 노태우는 6.29선언을 통해 호헌철폐를 약속했고,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돌아오게 되어 사실상 독재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노태우와 함께 경상도에 기반하고 있었고, 김대중은 전라도에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노태우는 3당 야합을 통해 야당을 내분시켜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모두 합의를 깨고 대통령선거에 나가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노태우가 당선되고 말았다.
여기까지 김종필은 숨죽이고 있다가 (계속 국회의원에 당선. 이번 17대에 떨어지기 전까지 9선이었다.-36년간 국회의원 생활을 한 것임) 노태우가 물러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재격돌때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한계를 느낀 김종필은 김영삼이 물러나고 김대중이 출마할 때 총리직을 약속받고 김대중과 손을 잡았다. 결국 자민련의 입장은 총리의 위상을 대통령보다 높이는 내각제 개헌으로 굳어졌고, 때 아닌 내각제논쟁이 벌어진 끝에 한나라당에 의해 김종필을 총리로 지명하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약속은 저지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총리서리'라는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총리가 없는 상황에서 김종필에게 그 임무를 대행시키는 위헌적인 방식으로 김종필을 실세로 앉혀놨다.
그리고 2004년 또 한번의 총선에서 진보와 보수의 양 갈래로 나뉜 판도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내지 못한 채 극단적 보수주의의 강령을 확정한 결과 중도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열린우리당 역시 개혁을 내세우고는 있었지만 안으로는 거의 중도보수에 가까웠다. (정책상) 이걸 포괄정당화라고 하는데, 표를 얻기 위해 메이져 정당들이 점점 극단에서 멀어져가는 현상을 말한다. 자민련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결국 당 내부 인물들의 노쇠화로 인한 극단적 보수주의의 득세, 그리고 김종필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인제가 민주당 입당에 이은 경선 탈락으로 인한 탈당 등으로 정치생명이 거의 끊어져 이제 마땅한 후계자도 없는 당의 총체적 부실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초기 여당인 국민회의(현 새천년 민주당)와 자민련이 합당하지 않은 까닭은?
김대중 정부 초기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당하였다면 현재의 정세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양측이 합당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서로간의 정체성이 확연히 틀렸기 때문이다.
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두 당은 후보단일화를 합의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집권시 국무총리는 김종필, 그리고 건설교통부, 해양수산부 일부 부처에 자민련 몫으로 공동정부를 만들자는데 서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쪽 모두 거야(巨野)인 한나라당에 비해 수적으로 너무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계개편을 통해서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쳐야 과반석을 넘기기 때문이다.
일단 짚어볼 때 김대중과 김종필은 표면상으론 집권시 내각제를 하자고 서로 악수를 했지만 실은 두 사람 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김대중은 애초부터 내각책임제를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보수기반과 충청도 세력을 둔 표를 염두해서 김종필과 손잡았다는 일반적인 평이다.
김종필 역시 명분상 타(他)당에 비해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내각책임제를 거론한 것이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정책을 제시 한다던가 국민들을 설득시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김종필 자신이 박정희 수하에서 강력한 대통령 밑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각책임제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쉽게 말해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고 보면 된다. 김종필 역시 2인자생활에서 그 탁월한 처세술로 장수정치를 했다.
하지만 2000년 4월11일 총선 때 자민련은 대패하고 만다. 새천년민주당(국민회의)도 제1당에 실패했다.
그때 합당이야기 솔솔 나왔다. 이참에 합당해서 정체성을 잡고 2002년도에 있을 대선에 충청ㆍ전라 표를 결집하자는 명분하에 말이다.
그런데 충청출신의 보수성향의 강창희, 김용환 의원 등이 결사반대를 외쳤다.
즉 수구보수성격의 그들과 그래도 중도 좌파를 걷는 임종석, 신기남, 송영길 의원들과는 물과 기름 같은 것.
그것을 계기로 국무총리로 있던 김종필은 자민련으로 복귀해서 명예총재가 되고 그 자리에 이한동이 들어가게 됐다.
보수성향 충청도의원들이 당의 정체성을 잃어간다며 김종필을 복귀시키는 한편, 두 당은 합당 대신 다시 공동정부를 추진하게 된다. 김대중의 집권2기를 여기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 때 두 당은 다시 갈라서게 된다. 남쪽에 8.15 기념방문단이 김일성을 찬양한 것 때문이다.
결국 급변하는 정세속에 자민련과 새천년민주당은 ‘판단미스’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민련은 지난 17대 총선 때 헌정사상 최초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이 0.2% 표가 모자라 낙선하게 되면서 정계를 떠났고,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자민련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자민련은 김학원 총재를 중심으로 재기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현정세로 봤을 때 자민련의 부활 성공 가능성에 표를 던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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