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날지 모르는
도시 개발지역 한가운데
뿌리를 내린
아버지처럼
보도블럭 틈 사이
작은 집 한 채
- 52쪽, '개미집' 모두
불의의 사고 당해 2년째 병실에 드러누워 있는 노동자 시인
서정홍(49)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상호는 경남 창원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시인의 아버지는 나이 열한 살 때 깊은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시인의 어머니가 마산 청과시장에서 과일장사를 하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웠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지금 고혈압과 관절염, 당뇨 등에 시달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시인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낮에는 전자공장과 신발공장, 냄비 뚜껑 손잡이 만드는 공장, 방 도배, 조립식 칸막이 공사장, 도시가스 배관설치, 철공소 등에 다니며 가족들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리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와 방송통신대에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시 쓰기를 좋아했던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1년, 마침내 그는 '들불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가족들의 끼니를 위해 노동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씨 고운 아내를 얻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도 낳았다. 남 부러울 게 없었다. 그랬던 그가 자동차를 고치다가 그만 사고를 당해 몸져눕고 만 것이다.
이상호는 흘린 땀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지금은 '자본의 바쁜 길' 위에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땀 흘린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현장에 가기 위해, 매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몇 년째 자식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식구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쉬지 않고 병실을 걷습니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지금 마산의료원에서 투병 중인 노동자 시인 이상호의 첫 시집 <개미집>은 시인이 꿈꾸는 이 세상의 자그마한 보금자리이다. 시인은 크고 화려한 꿈을 꾸지 않는다. 그저 내가 흘린 땀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세상, 가족들과 동료가 의식주 걱정 없이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세상을 꿈꾼다.
말 없는 사람들, 야간작업, 죽순 하나, 그 겨울 어느 날, 합포만, 비정규직 노동자, 야간작업 마치고, 어느 봄날, 고향 생각에 젖어, 아버지 제삿날, 이삿짐을 싸며, 손바닥에 핀 봄꽃, 아침회의, 가불인생, 도장공 정우 형의 넋두리, 운수 좋은 날, 봄비 오는 밤, 신문을 보다가, 짜장면, 내 자리 등 62편이 그것.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서정홍 시인은 "이상호 시인은 살아 있는 한 시를 쓸 것이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읽어도 알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는 시를 쓸 것이다"며 "(이는 시인 이상호에게) 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삶과 철학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크고 화려한 집과 분에 넘치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소쿠리에 넣어 둔 쌀밥
아끼다가 아끼다가
며칠 동안 깜박 잊고
먹지 못한 밥을 씻던 어머니
냄새가 나는 지
씻고 또 씻어 가려 낸 밥을
어머니는 맛있게 드셨다
오늘은 며칠 동안 냉장고 안에서
잊혀졌던 식은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의 긴 한숨 같은 밥을
씻고 또 씻어서
그냥 버리지
냄새 나는 밥을 왜 먹어요?
밥을 밥으로만 여기는
아내의 잔소리도 맛있게 먹는다
- 46쪽, '밥' 모두
이상호 시인의 시를 읽으면 가난을 이불 삼아 덮고 자란 시인의 배고픈 날들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정규직 노동자처럼 노동조합도 함부로 꾸릴 수가 없고, "저 당당한 파업은/ 꿈조차 꾸지 못"(비정규직 노동자)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땅 푹 꺼지는 한숨소리가 시구 여기저기에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로 비집고 나온다.
"계약직 이 년 끝내고/ 새 직장 찾아간 성수 형// 취한 목소리로/ 주절주절/ 사는 게 겁이 난단다"(전화)라는 그 서글픈 목소리도 들린다. "주 오일 근무 아니라도 좋습니다/ 몇 천만 원 연봉 아니라도 좋습니다/ 월급 밀리지 않고/ 일자리 걱정 없는 세상/ 다만 그런 세상이면"(비정규직) 하고 사용주에게 매달리는 시인의 몸부림이 엿보인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꼭 하루라도 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며 열심히 살았던 시인 이상호. 지금 시인에게는 의식주를 이어나가기 위해 어린이집 시간제 강사로 나가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비 온 날 죽순 자라듯이 쑥쑥 자라나는 네 살 난 아들과 두 살 난 딸이 있다.
시인 이상호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토록 일에 목매달아 하는 까닭은 바로 자신에게 줄줄이 매달린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처럼 크고 화려한 집에서 맛난 음식을 배 터지도록 먹는 풍족한 삶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개미처럼 부지런히 땀 흘리며 일을 할 수 있는, 그리하여 가족과 이웃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안정된 직장을 원한다.
"구인광고 내 놓았다", 아내의 뼈아픈 말 한마디
한 달 두 달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하얀 병원 건물 안
이동식 침대
내 자리
네 살 된 아들
돌이 다 된 딸
일 나갔다가 아이들 데리고 와
밤마다 다독이며
잠드는 아내
그 옆 빈 자리
내 자리
몇 달 전부터
구인광고 내놓았다는
그 자리 내 자리
- 101쪽, '내 자리'
시인 이상호의 병명은 추간판탈출증이다. 시인은 재활을 위해 병실을 열심히 걷는다. 하지만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허리 수술한 부위 윗부분에는 다른 증세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가 막힌다.
특히 이른 아침 "병원 앞 정류장/ 통근버스들이 줄을 선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워 떠나면/ 새순 돋는 은행나무들만 남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속이 쓰리다.
그래.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시인 이상호에게도 "통근버스를 타려고 줄 섰던 날들"이 있었다. "두터운 점퍼를 입고/ 새벽 찬바람 속에서도 동료들과/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떠오르는 햇살 속으로 달려가던 날들"(창문에 기대어)이 있었다. 근데, 지금은 일터로 달려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런 그의 마음은 오죽 쓰리고 아프겠는가. 낮에는 "일 나갔다가 아이들 데리고 와/ 밤마다 다독이며/ 잠드는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마나 서럽겠는가. 그의 아내가 남긴 "몇 달 전부터/ 구인광고 내놓았다"는 그 뼈아픈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주삿바늘이 되어 콕 꽂히지 않겠는가.
<개미집>은 시인이 꿈꾸는 아주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이다
월급날
아내는 계산기부터 두드린다
관리비, 수도요금, 전기요금
어머니 생활비
주택청약예금
맞벌이할 땐
적은 돈이지만 적금이라도 하나 넣고
외식이라도 가끔 했는데
내 용돈 쪼개고
기름값 아끼고
생활비 줄여도
몸 아파도 병원 갈 돈조차 없단다
그러니까
안 아프면 되지
억지소리를 했지만
좋다
이번 달도 가불이다
- 72∼73쪽, '가불인생' 모두
<개미집>은 공장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던 노동자 시인 이상호가 이 세상에서 꿈꾸는 아주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는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작은 꿈 하나하나를 쌓으며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사람에 대한 살가운 정과 포근한 사랑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다.
지금 시인은 비록 사고를 당해 허리에 쇠를 박아 고정수술을 했고, 목도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지극히 정상이며,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이 세상 사람들의 깊은 병을 치료하는 의료기구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가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 그의 예쁜 아내와 자식 둘이 있는 개미집으로 돌아가 지금껏 쌓고 있던 작은 꿈 하나를 올곧게 엮어나가길 바란다.
정규화 시인은 "이상호 시인은 객토 동인의 막내로써 역사인식이나 삶의 현장에서 선배시인들의 체험과는 다르다, 시대의 아픔이 그의 시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이응인 시인은 "그의 꿈은 소박하다, '월급 밀리지 않고 일자리 걱정 없는 세상'이다, 천박한 자본으로 도배된 세상에 너무 소박해서 눈물겹다"고 덧붙였다.
이상호 시인은 1971년 창원에서 태어나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원, 마산지역 노동자 시인들의 모임 '객토문학' 동인이기도 한 시인은 2004년 10월 15일, 공장에서 자동차를 고치던 중 사고를 당해 지금까지 병원생활을 하며, 틈틈이 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