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和音,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 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粒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 '도장골 시편- 부빈다는 것' 전문.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의 삶을 노래하는 현역 시인들의 삶 가운데 누항(陋巷)의 삶이 아닌 게 있으랴? 그 가운데서도 가장 힘겨운, 극빈(極貧)의 삶을 살아가는 시인으로는 강화도 바닷가의 함민복 시인과 충청도 어느 산골의 김신용 시인을 들 수 있겠다.
김신용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도장골 시편>이 얼마 전 도서출판 '천년의시작'에서 나왔다.
김신용 시인은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했다. 등단 작품을 비롯한 그 후 그가 쏟아낸 시편들은 구두닦이, 지게꾼 등의 힘겨운 삶의 체험이 오롯이 담겨 있다.
최소한도로 삶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빈집이 수두룩한 시골 마을인 도장골로 들어간 몇 해 동안 시인의 삶이 이번에 새롭게 펴낸 시집 <도장골 시편>으로 시화(詩化) 되어 있다. 시집은 모두 55편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 4편의 시를 제외한 51편이 이른바 '도장골 시편' 연작시들이다.
부레옥잠, 다람쥐, 벌레, 담쟁이넝쿨, 민들레꽃, 폐가, 개복숭아, 반딧불이, 마른 수수밭, 밤(栗), 안개, 청개구리, 질경이, 두꺼비 등 '도장골'의 여러 자연물이 시의 주된 제재(題材)들이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날 동안 밑바닥 인생의 곡절 많은 삶의 체험과 시인의 예민한 시적 감수성으로 그 자연물들은 모두 세상살이의 참모습, 삶의 이법(理法)을 그려내는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 '도장골 시편-민달팽이이' 전문
김신용의 이런 시 세계를 두고 한국 시단의 중견 시인 천양희 선생은 "도장골 시편들은 그의 등에 접골된 뼈 같고, 날개와 눈이 하나씩 있어서 시와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시의 거대한 새 비익조 같다"고 평했다.
이어 천 선생은 "그의 시는 마치 엘리엇과 예이츠처럼 나이 들수록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져, 그 무게를 더하고 있어 늘 회생(回生)한다"면서 "자신의 몸을 쳐 삶을 건너온 자들은 그 시편들을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김신용의 다섯 번째 시집 <도장골 시편>을 읽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시인 자신의 몸과 인생에 화인(火印) 같이 새겨진 삶의 막막함과 고통을 그 스스로 녹이고 또 녹여내어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사물(事物)들에까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2006년 작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가장 좋은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한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 연작은 올해 우리 한국 시단이 거둬들인 값진 성과물이다. 그의 '도장골 시편' 연작시는 한국시의 새 그늘로 자리를 잡을 것임이 분명하다.
누에는 다섯 잠을 자고 나면 질적 변신을 꾀하여 고운 고치실을 뽑아낸다. 다섯 잠을 자고 난, 즉 다섯 권의 시집을 펴낸 이후에 새롭게 부를 김신용 시인의 노래가 무척 궁금하다. 점점 한국 시단의 새 그늘을 펼쳐갈 그의 행보(行步)를 똑똑히 지켜보리라.
그런데 저 위에 있는 민달팽이가 소리친다. 괴발개발 펼쳐놓는 이종암의 글자들 그만 치워라? 김신용 시인의 시 한 편이라도 더 읽어보자!
맨땅이었다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나?
여름이 되면서 난처럼 피었던 잎들 하나 둘 진무르면서
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워지더니
어느 날 불쑥, 잎그늘 하나 없는 그 맨땅에서
꽃대 한 줄기 솟아올랐다
돌 섞인 흙과 딱딱하게 굳은 흙바닥일 뿐인 그곳에서
그 흙바닥 밑에 뿌리가 묻혀 있었는지조차 잊었는데
마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기억을 일깨우는 송곳처럼
닫힌 망각의 문을 두드리는 손가락처럼
솟아올라, 맑은 수선화를 닮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물었다
세상에! 잎이 다 진 후에야 꽃대를 밀어올려 꽃을 피우는 뿌리가 있다니!
이 어리둥절함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이 돌연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무슨 畸形의 식물 같은, 잎 하나 없는 꽃대
깡마른 척추뼈가 웃음을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꽃을
굳어버린 흙이 흘리는 눈물방울이라고 해야 하나?
지워져버린 잎들이 피워올리는 비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빈 밭에서 우뚝 몸 일으킨 아낙처럼
가느다란,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꽃대가 꽃을 물고 있는 모습
가슴에 찍히는 지문이듯, 火印이듯 바라보아야 하나?
언제 그곳에 잎이 있어나?
싶은, 그 맨땅에서, 잎도 없이 솟구쳐올라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
이미 멸종된 공룡이
돌처럼 굳어버린 내 의식의 시멘트 광장에 불쑥 나타나, 사라진 쥬라기의 노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일생을 잎을 만날 수 없다는 꽃
상사화, 저 꽃이 피는 모습을
- '도장골 시편-언제 그곳에 잎이 있었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