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과 같은 이미지를 지닌 이 어색한 말을 굳이 쓴 것은 '남의 나라에 가서' 죽은 사실을 더 이질화 해버리려는, 국적이 다를(이국) 정도가 아니라 땅 그 자체가 낮선, 흙이 다른 먼 땅(이토)을 연상시키려는 시인의 뜻이 스며있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인생 무상을 자극 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먼 이역의 귀신이 된 한 젊은이. 가사 일본만이래도 그 이름은 낯설지 않으련만 그냥 '이토'라 하여 지명이 없는 땅을 지목함은 당시 조선인의 처량한 운명의 상징이리라.
나서 자란 곳 묻지 말고 어디서 죽느냐를 따지자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차라리 미신으로 제켜 버리려는, 사뭇 <향수>의 시인과는 다른 노마드의 삶을 닮은 인생관이 짙은 이구절은 전쟁에 동원된 젊은이의 일상을 상기시킨다.
"물에도 무덤은 선다"는 건 딱히 바다에서 전사한 사실만이 아니라 물처럼 유전하는 인생이 어딘들 무덤이야 없으랴는 뜻으로, 이건 충성과 피로 고와진 흙이라는 뒷구절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씨를 뿌리게 된 것은 오랜 믿음의 소산이란 뜻일텐데, 여기까지 이 시가 지향하는 바는 한 전사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그런데 끝구절 "기러기 한형제 높이줄을 마추고 / 햇살에 일곱식구 호미날을 세우자"에 이르면 이 시가 상징이라기 보다는 매우 구체적인 모델이 존재했던 소재임을 유추케 만든다. "일곱식구"란 구체적인 지적은 정지용 시인이 이무렵에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한 청년의 전사 사실을 모델 삼아 노래했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시 전체가 독법에 따라서는 당시의 정복전에 희생된 한 젊은이를 애도하면서 그 의미를 찾는 형식인데, 끝에서 구태여 "가족"문제로 환원시켜 버린 것은 시인이 일제의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닌 잔여 가족의 생존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호미날"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 농민적 삶의 상징이 호미 아닌가. 그 호미날을 세우자는 건 사랑이기 보다는 차라리 증오와 원한에 가깝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모순에 차있다. "충성과 피"란 구절 때문에 다분히 강렬한 충성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나 이내 마무리에서 완전히 그 힘을 탈진시켜 호미날을 세우는 것으로 맺음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시인은 그걸 노렸을 터이다. 전선에 가서 죽어봤자, 이러저러한 명분으로 전사해 봤자 세상 사람들은 그 죽음이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다고들 떠들테지만, 남은 가족들은 고작 호미날이나 세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 인생파적인 서사구조가 이 시를 이룬다.
만약 끝구절이 없었다면 이 시는 영락없는 친일시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일곱 식구들이 "영미 귀축(英美 鬼畜)"을 무찌르려고 총후(銃後)의 충성심에서 호미날을 세웠다는 억지는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그러고자 했다면 호미가 아니라 적어도 곡괭이쯤은 되어야 했을 것이며, 시인이 호미와 곡괭이를 구별 못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이 시는 초반부와 마지막에서 인생의 무상과 현실적인 삶의 고달픔이 그려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중간부분은 다분히 친일적일 수도 있다는 착란을 고의로 유발한다. 시인의 치밀하게계산된 구도인 것 같다.
아마 먼 훗날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작법 비밀을 들려주기 위한 준비인 듯이 정교하게 가족적인 생계와 호미날 세우는 것으로 중간부분의 의식을 흘려서 표백해 버린다. 아, 저렇게 먼 땅에서 죽은 넋을 향해 충성이니 뭐니 하지만 실은 기러기 떼처럼 처량하게 우리 동포는 어깨 맞춰 호미날 갈아야 할 것을, 이라는 이미지의 내장 장치로 이시는 독해할 수 있다.
시어나 이미지 창조의 기교에서 가장 비 정지용적인 이 작품은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없을 만큼 그 예술성부터 졸속한 편인데, 이건 시인이 이 작품에다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정성 들이지 않았다고 친일시가 아니란 말은 성립되지 않지만 다른 친일시를 아무리 검토해 봐도 이렇게 오리무중에 애매한, 대중 선동을 목적으로 삼았던 유행가사 같았던 시들과는 그 발상 자체를 달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시 한 편을 남겼다고 그를 친일파로 몰아 부칠 수 있을까.
아무리 푸새의 것인들 그 어느 땅에 났던가 라고 타박한다면 할말은 없다. 대체로 이런 극단적인 논리는 진정 친일파를 객관적으로 분석, 평가하려는 진지한 의도보다는 '전국민 친일파'로 휘몰아쳐서 아예 친일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물타기 시켜버릴 우려를 자아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