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꽃 붉은 그 길에
울 줄 몰라 그냥 돌아서던 그 길에
접낫처럼 낮달 떴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붉은 그 꽃길 지나
춤을 추며 나돌아 간다.
-21쪽, '그 길' 모두
인생을 비추는 한 방울 영롱한 이슬 같은 시
시인 윤상운의 <배롱꽃 붉은 그 길>을 읽는다. "배롱꽃 붉은 그 길에/ 울 줄 몰라 그냥 돌아서던 그 길에/ 접낫처럼 낮달 떴다"는 시구가 가슴을 툭 친다. 떠나는 님을 바라보며 배롱꽃처럼 붉은 울음 속으로 삼키며 뒤돌아서던 그 길에, 하필이면 자그마한 낫(접낫), 아주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쏘옥 빼다 박은 낮달이 떠 있다니!
아프다.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하긴, 사랑하는 님을 보내는 그 길이 오죽 오래도록 눈에 밟혔으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아 울 줄 모른다고 했겠는가.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사랑하는 그 님을 보내고 돌아서던 그 마음이 오죽 슬프고 가슴이 쓰렸으면 처용처럼 몸부림(춤)을 치며 돌아섰겠는가.
아니, 어쩌면 회갑을 코 앞에 둔 시인이 그동안 밀쳐 두었던 시쓰기를 갑자기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인지 모른다. 근데, 시인은 왜 지난 30여 년 남짓 흐르는 세월 동안 시를 놓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내 인생을 비출/ 그 한 방울"(시에게 2), 영롱한 이슬 같은 시가 이제서야 시인의 가슴에 다가온 것일까.
그대로 시가 되어버리고 싶은 시인 윤상운
"내게 남겨진 나날
시를 생각하며 눈 뜨고
시를 생각하다 저무는 하루 되기를" -'시인의 말' 모두
시인 윤상운(58)의 두 번째 시집 <배롱꽃 붉은 그 길>(신생)을 읽고 있으면 갑자기 도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차분하게 이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며, 그 속에 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삼라만상에 소롯히 비춰내는 시인. 시인의 눈썰미는 이른 새벽 풀잎에 영롱하게 맺혀 있는 이슬처럼 맑고 깨끗하다.
'배꽃 하얀 봄날', '춥게 잔 밤', '엄니의 겨울', '그 물소리 그 달빛', '봄날 꿈을 꾸다', '빗방울 그 멀고도 먼 길', '목련이 피면 피리를 불며', '장승의 꿈', '별에게', '뻐꾸기에게 띄우는 편지', '내 소녀', '까마중을 먹으며', '시에게 1,2", 황산시편' 연작 5편, '고운, 바람과 구름에 부친 그리움' 연작 3편을 포함 모두 77편의 시가 그것.
시인 윤상운은 자신에게 남은 세월, 그 세월이 얼마가 될런지는 잘 몰라도 시와 함께 숨 쉬며 시와 함께 뒹굴고 싶다. 아니, 그대로 시가 되고 싶다. 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내 인생의 모든 슬픔을 담을/ 내 인생의 모든 그리움을 담을/ 내 인생의 모든 외로움을 담을"(시에게 2)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소쩍새 울면 가슴이 저려 술 없이 잠들지 못하는 시인
당신에게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나는 자주 춥습니다
거리를 걷다가도 나는 몸을 웅크립니다
아무리 몸을 작게 만들어도
추위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14쪽, '춥게 잔 밤' 몇 토막
시인 윤상운은 긴 침묵 끝에 시로 돌아왔다. 지금 시인이 가는 길은 "배롱꽃 붉은 그 길에/ 울 줄 몰라 그냥 돌아서던 그 길"(그 길)이 아니다. 그때 잃어버린 "눈물이 내게로 돌아" 오듯이, 그렇게 시의 품에 안겼다. 이제 시인은 시에게 부탁한다. "외로움 피가 되어 흐를 때/ 시여/ 그 피를 먹고 자란 시들지 않는/ 장미"(시에게 1)를 피워달라고.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시의 품에 돌아온 시인에게 시는 그저 꽃을 피워주지 않는다. 아니, 시인의 몸에 오래도록 깃든 그 고된 세상살이의 해묵은 추위 때문에 시가 꽃을 피워주고 싶어도 피울 수가 없다. 시인은 시가 자신의 몸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몸을 자꾸만 웅크리지만 시인의 몸에 옹이처럼 박힌 그 추위는 좀처럼 물러가지 않는다.
대체 시인의 몸을 꽁꽁 얼리는 그 추위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엄니와 나를 버린 아버지","우는 모습 감추며 몰래 울던 엄니의/ 눈물"에서 추위가 시작되었을까. "울음이 터지면 이 악물고 삼키며 하늘 보며" 자란 시인, "소쩍새 새도록 울면 가슴이 저려/ 술 없이 못 자는 나"(한) 때문에 그 추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꽃은 눈물이 피운다
눈물이 피우지 않았다면
꽃들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뭉쿨하게 할까
저 찬란한 울음 알맹이들
슬픔들이 모여 이룬 마을에서
나 그대에게 주고 싶던
숨겨온 눈물 있네
-72쪽, '메밀꽃 피는 마을에서' 몇 토막
꽃은 눈물이 피우는 것이라고 믿는 시인 윤상운. 시인에게는 왜 아름답고도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눈물로 보이는 것일까. 시인이 회갑이 다가오도록 잊지 못하고 가슴에 깊숙히 품고 있는 '그대'는 과연 누구일까. 그대가 누구이기에 "우리 헤어진 후/ 내 눈물의 한가운데/ 그대 모습 꽃으로 피어/ 찬란한 울음 알맹이로 빛"나고 있는 것일까.
"치매에 몸 오그라드는 엄니"(한)일까. "복사꽃 피면 복사꽃 바라보던 그 마음 데리고/ 찔레꽃 피면 희게 부서지던 그 웃음 데리고/ 가슴 봉곳해진"(강가에서) 그 처녀애일까. 아니면 "유월/ 빛나는 햇살 아래/ 양파 농사에 허리 휘던 한 여자"(창녕을 지나며)이거나 "꼭 한 번은 만날 것 같던/ 내 소녀"(내 소녀)일까.
시인은 지난 세월 내내 몸과 마음에 새겨진 그대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언젠가 바람으로 나 떠나는 날/ 내 마음 속 그대의 모습/ 그대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그렇게 해야 "내 눈물 속 하얀 메밀꽃 꽃잎 같던 그대"가 "홀로 찬란하게 반짝"일 거라고. 시인은 스러지는 한 순간의 고요가 모여 눈물빛 인생을 비추는 시처럼 그대도 그렇게 빛날 거라고 믿는다.
시 곳곳에 시인의 자화상처럼 박혀 있는 '그대'는 누구일까?
이승 떠난
저승의 어디쯤
그대는 이제 그대의 이어도에 들었는가
그대 찾던 이어도
오늘
제주의 노을 속에서 문득 보네
-86쪽, '노을-김영갑에게' 모두
시인 윤상운의 시 곳곳에는 '그대'가 자화상처럼 박혀 있다. 시인이 말하는 '그대'는 어릴 때 몹시 사랑했던 '내 소녀'이기도 하고, 남편 없이 홀로 시인을 키워낸 엄니이기도 하고, 그동안 시인이 살아오면서 만난 사천댁이나 김영갑이기도 하고, 시인의 눈에 비치는 삼라만상이기도 하다.
<배롱꽃 붉은 그 길>은 배롱꽃처럼 붉은 사랑을 찾아가는 느릿느릿한 여행길에서 이 세상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한 시인의 제 얼굴 찾기다. 요즈음 시인들이 언뜻 여기기에는 꽤 초라해보이는 옛 서정의 삽을 들고 깨끗한 사랑의 물꼬를 터며 떨구는 시인의 굵은 땀방울은 구슬처럼 영롱하다.
문학평론가 하상일(동의대 문창과) 교수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윤상운의 시에는 평범함의 미학이 있다"며, "장황한 요설과 화려한 수사와 알쏭달쏭한 외계어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단에 이토록 전통적인 발상과 어법으로 잔잔한 서정시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가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시인 윤상운은 1947년 대전에서 태어나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가'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오랜 침묵의 기간을 가지다가 2004년 <잉여촌> 복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달빛 한 쌈에 전어 한 쌈>이 있으며, 지금은 부산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