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간이역이 있다
뒤에 간이역이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김판용 사진에세이집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 사람, 김판용

10여 년 앞부터 카메라를 들고 우리나라 곳곳의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바람처럼 누비고 있는 나그네. 길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주 작은 들꽃에서부터 언뜻 하찮게 보이는 간이역과 돌담집 등 우리 기억에서 점점 잊혀가는 고즈넉한 풍경들을 필름에 담으며 글을 쓰고 있는 사진작가 겸 전통문화운동가이자 문화, 역사 답사가. 그가 바로 전북에서 교육계에 몸을 담고 있는 시인 김판용(47)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봄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를 본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그때 김판용은 기자가 몸담고 있는 월간 <한길문학>에 뛰어난 시를 자주 투고했으며, 마침내 편집위원들에게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신인으로 뽑혔다.

하지만 김판용은 불행하게도 그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지 못했다. 그를 신인으로 내보내려 했던 문예지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일 년 남짓 지난 뒤에서야 월간 <한길문학>이 아닌 '한길의 시' 시리즈 <그대들 사는 세상>에 신인작품을 발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때 만난 김판용의 첫인상은 주어진 현실을 매섭게 다루고 있었던 실천의식이 강한 그의 시와는 달리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말수도 적었고, 행동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마음씨 또한 폭넓고 포근했다. 술은 몇 잔 마시지 못했으나 끝까지 술좌석에 앉아 주변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김판용이었다.

세상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 꾸려나간다

"나는 어릴 적 봄이 오는 것이 무척 싫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겨우내 곡식이 바닥나 봄이면 썩은 고구마까지 우려먹어야 하는 배고픔이 싫었고, 또 하나는 어른 못지않게 농사일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이 싫었다./ 그러나 싫은 봄은 왜 그리 눈부시게 다가왔었는지 모른다." - 66쪽,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몇 토막

그렇게 문단에 등단한 지 15여 년 남짓 지나도록 첫 시집조차도 펴내지 않고 있던 시인 김판용이 오랜 침묵을 깨고 사진에세이집 <꽃들에게 길을 묻다>(예감)를 펴냈다.

근데, 그는 왜 시에게 길을 묻지 아니하고 꽃들에게 길을 묻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들판 여기저기 흔하게 피어있는 아주 작고 하찮은 꽃들에게.

시인 김판용은 머리글에서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며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조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 하나 풀 하나 그리고 돌멩이 하나, 물방울 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이 모여 세상을 꾸민다"고 귀띔한다. 말 그대로 사람은 이러한 자잘한 것들의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

김판용은 "그동안 여행하면서 들꽃과 간이역 그리고 작은 학교 등 여리고 하찮은 것들에게 말을 걸거나 위로해가며 내 가슴으로 불러들인 것들이 이 책 속에 박혀 있다"며 "이 책은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고, 담은 것이 아니라 담긴 것들"이라고 덧붙인다. "떠도는 그 순간이 꽃시절"이라고 내뱉는 그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꺾인 꽃의 향기가 오래가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책상 위에 꽂힌 프리지어가 시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기다림을 희망으로 아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꽃의 향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향기는 사랑을 부르는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 꽃들은 수정을 하고 나면 깊었던 향기의 샘을 닫아버린다." - 45∼46쪽, '꽃들도 사랑을 한다' 몇 토막

시와 에세이, 컬러사진이 예쁘게 어우러진 이 책은 '해를 기다린다', '꽃들도 사랑을 한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뒤에 간이역이 있다', '나무는 서 있다', '스님, 뒤돌아 보세요',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꽃들에게 길을 묻다'. '꽃은 져도 꽃이다', '사랑, 그 연등 불빛 아래', '꽃, 목숨을 걸다' 등 모두 16편이 실려 있다.

이들 중 아무렇게나 뽑은 '꽃들도 사랑을 한다'에 나오는 글을 하나하나 곰곰이 새겨보면, 시인 김판용이 왜 꽃들에게 길을 묻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시인 김판용은 "혹시 누군가에게 받은 꽃들이 시들지 않고 향기가 오래 간다고 좋아하지는 않았는가?"라며 읽는 이에게 되묻는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바친 그 아름다운 꽃은 사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상대를 만나려 온 힘을 다해 향기를 내뿜다 이윽고 쓰러지고 만다는 것. 사람이 참으로 잔인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 또 그런 까닭에 비록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창밖에 내놓아 벌과 나비가 날아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차역은 오늘도 사람과 기차를 기다린다

"중학교 때 철로 밑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누나와 형이 만나 철길 따라 천천히 걷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었다. 철로 위에 책가방을 들고 천천히 걷는 한 쌍의 청춘 남녀가 두 가닥 철길처럼 끝없이 걸어가며 영원히 이어지는 듯했다." - 90쪽, '뒤에, 간이역이 있다' 몇 토막

시인 김판용은 꽃들에게만 길을 묻는 것은 아니다. 시골 간이역, 벌겋게 녹슬어가는 선로 변경 조정기의 신호를 따라 기차가 들어오던 철로, 그 평행으로 뻗어나간 녹슨 철로에서도 길을 묻는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폐역이 되었지만 그곳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기차역은 언제나 사람을 기다리고 열차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차역은 이미 기차가 다니지 않는지 꽤 오래되었다. 게다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기차역 광장 들머리에서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자신처럼 늙어버린 기차역을 바라보며 그 누군가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다.

시인은 이미 기차가 다니지 않는 "서도역의 쓸쓸함을 등에 지고" 있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언뜻 그 할머니에게 다가가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은 뒤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리고 싶다. 하지만 시인은 그만둔다. 그 할머니가 서도역에서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마음에 영원히 새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꽃을 안다

"꽃이 핀다는 것은
그리움이 사무쳐 삭는다는 것.
내 안의 피가 솟아
터지는 상처 같은 것이리.
무엇도 나를 지치게 할 수는 없지.
오지 않는 그대로 하여
날은 가물고
그래서 불꽃을 피우다
남몰래 잎들 지우지.
하나, 또 꽃을 피운다는 건
아직 가슴이 뜨겁다는 것.
만 리의 그대까지

거리를 지져대는 불 가슴에 살아
붉게 터지는
저 기다림의 활화산

- 144∼145쪽, 김판용 '꽃이 핀다는 것은' 모두

시인 김판용은 꽃이 피어나는 것은 "먼 그때까지의 거리를 불로 지져가는 뜨거움" 때문이라고 속삭인다. 식물들이 "어두운 땅 속을 뿌리로 더듬어서 세상이 버린 썩고 추한 것들을 걸러내 빨강과 노랑, 보라색의 꽃을 피"우는 것을 깨치기 위해서는 "뜨거운 가슴으로 한때 꽃(사랑)이 되어" 본 사람만이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 작은 꽃들과 간이역 사라져가는 학교 등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시인 김판용은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삶의 길은 무엇인지, 그 길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한다.

시인 김용택은 표4에서 "선생이고, 시인이고, 그리고 정다운 자연의 친구인 김판용은 작고 사소한 것들의 순간을 사진에 담고 글을 써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며 "그의 글과 사진들은 소박하고, 정겹고 다정하다, 김판용 그의 일상이 거기 그렇게 평화롭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인 김판용은 1960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91년 '한길의 시' <그대들 사는 세상>에 '수해나기', '정주역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교실 속의 우리 문학> <모악산> 등이 있다.

1985년부터 문화사학자 신정일과 함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한 시인은 20여 년 동안 문화, 역사 답사를 해온 답사전문가이자 전통문화 계승운동을 펼친 문화운동가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