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날처럼 포근한 겨울 오후
수정에서 저도로 가는 환승버스는 두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두 평 남짓한 환승실에 혹은 쪼그려 앉고 혹은 일어서서
한미FTA 협상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칼라TV를 멍하니 쳐다보며
저도로 가는 버스를 천불나게 기다린다
운전기사들은 버스회사에서 외상값을 갚지 않아
이제는 밥집에서조차 밥을 주지 않는다며
머슴도 세 끼 밥은 먹이면서 일을 시킨다며 쑥덕거린다
아마, 그 환승버스 기사는 잣대 놨을 거야
우리도 곧 잣대 놔야 되지 않겠어?
몇 개월째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해 울상인 운전기사들
저만치 바다를 숨긴 빈 들녘 한 귀퉁이에선
내일 아침 밥상 위에 오를 봄동이
초록빛 잎사귀를 돌돌돌 말고 있고
밭두덩 곳곳에서는 검푸른 빛을 띤 냉이가
가끔 불어오는 짠바람에 온몸을 파르르 떤다
썰렁한 겨울햇살마저 비껴가는 수정 버스환승장
마산시청이란 글씨가 등에 씌어진 옷을 입은 사내 하나
쓰레기통에서 이기 돈 된다며 알루미늄 깡통을 골라내고
컵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떼운 중늙은 운전기사 하나
컵라면 봉지를 마구 찌그려뜨리며 하늘 높이 던진다
흰둥이 한 마리 잽싸게 뛰어가 컵라면 봉지를 물어오고
운전기사는 컵라면 봉지를 더욱 멀리 던진다
그렇게 몇 번 찌그러진 이 세상 같은 컵라면 봉지를 던지자
흰둥이도 지쳤는지 더이상 달려가지 않는다
저도 쪽 하늘에는 임금투쟁 머리띠처럼 붉은 노을이 지고
환승장 곳곳에도 배 고픈 어둠이 꾸역꾸역 밀려드는데
며루치떼 펄떡이는 바다로 가는 버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이소리, '저도 앞바다로 가는 길' 모두
저도 앞바다로 가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는 겨울 오후. 행여 지금쯤 비음산(510m) 오솔길 옆 과수원에 듬성듬성 서 있는 매화나무가 동글동글한 꽃봉오리를 말아올리고 있지는 않을까. 며칠 나그네가 한눈을 판 사이에 매화나무 가지마다 눈처럼 하얀 꽃이 매달려 있지는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비음산 들녘으로 나갔다가 헛물만 켠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
갑자기 눈부신 겨울 햇살이 잔잔한 파도 위에 은빛으로 톡톡 부서지는 푸른 남녘바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그 푸른 바다에 가서 지금쯤 울퉁불퉁한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포근한 겨울 햇살에 기지개를 한껏 켜고 있는 싱싱한 생굴을 따먹고 싶었다. 그 바닷가에 서서 소주 한 잔 마시며 오래 겨울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생굴이 되고 바다가 되고 싶었다.
그 길로 나그네는 곧장 창원검찰청 앞에서 마산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탔다. 그리고 마산 어시장 앞에 내려 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수정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수정 버스환승장에 가면 저도 앞바다로 가는 환승버스가 자주 있다는 구복예술촌 촌장 윤환수(57·서각가) 선생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정에서 저도 앞바다로 가는 환승버스는 두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나그네의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고, 주머니엔 동전마저 없었다. 게다가 수정 버스환승장(마산시 구산면 수정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마저 문이 닫혀 있었다.
답답했다. 수정 버스환승장에는 구복이나 저도 쪽으로 가려는 중늙은이들이 웅성거리며 눈이 빠져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에서 사온 컵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운전기사들
지난해 12월 허리춤께. 나그네는 섬의 모습이 누워 있는 돼지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저도(猪島,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 앞바다에 가기 위해 수정 버스환승장에서 내렸다. 하지만 오후 3시가 지나고 오후 4시가 다가오는 데도 저도로 가는 환승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마산으로 돌아가자니 그동안 기다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왜 저도로 가는 환승버스가 이리도 오지 않느냐고 컵라면을 먹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운전기사는 나그네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이게 점심입니더, 요즈음 버스 준공영제 때문에 회사에서 기사들 월급을 주지 않습니더, 어디 그뿐입니꺼, 기사들 밥 먹는 식당까지도 돈을 주지 않아 밥까지 쫄쫄 굶고 다닙니더"라며, 하소연 섞인 말을 툭툭 내뱉었다.
나그네가 "아,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하면 버스회사 입장에서는 더 좋을 텐데, 왜 그럽니까?"라고 묻자, 운전기사 왈 "바로 그 때문 아입니꺼. 시에서 돈이 나오모 기사들 밀린 월급과 밥값을 주모 되지, 굳이 자기 돈 쓸 필요가 없다꼬 생각하고 있다 아입니꺼. 한 마디로 도둑놈 심뽀지예. 한 30분쯤 더 기다리모 버스가 올낍니더" 했다.
기가 막혔다. 창원시와 마산시에서 시민의 편리와 운전기사의 안정된 수익을 위해 만들려는 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오히려 버스회사만 더욱더 살 찌우는 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입맛이 씁쓸했다.
환승장 간이식당마저 문을 닫아버려 시내 슈퍼에서 사왔다는 컵라면을 게눈 감추듯 후루룩 후루룩 먹고 있는 운전기사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쬐끄만 바다의 밭 한 뙈기에 1억에서 2억?
그렇게 30여 분을 더 기다리자 마침내 저도 쪽으로 가는 환승버스가 닿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나그네와 환승장에서 버스를 오래 기다렸던 중늙은이 대여섯 명이 서둘러 버스에 오르자마자 버스가 바람처럼 달린다. 이어 채 15분도 지나지 않아 버스는 나그네를 은빛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구복 앞바다에 떨어뜨린다.
나그네가 구복 앞바다에 내린 그날이 일곱 물이었을까. 물 빠진 구복 앞바다 개펄 곳곳에서는 아낙네들이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떼 지어 몰려나와 무언가를 캐고 있다. 무얼까. 나그네가 가까이 다가서자 개펄에 쪼그리고 앉은 아낙네들의 바구니에는 소라와 게, 조개류, 굴 따위가 반쯤 채워져 있다.
근데, 개펄에도 중간중간에 자잘한 돌무더기가 밭둑처럼 쌓여 있다. 이 돌무더기가 바로 이곳 어민들이 저마다 개펄에서 살아가는 어패류를 키우는 바다의 밭 경계선이다. 이곳에서 구복예술촌을 꾸리고 있는 석강 윤환수 선생의 말에 따르면 50평 남짓한 이 바다의 밭 한 뙈기 가격이 위치에 따라 1억에서 2억까지 한다니 놀랍다.
구복 앞바다에 드넓게 펼쳐진 개펄을 뒤로하고 저도 앞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45도 남짓한 오르막길을 넘어서자 거기 나그네가 그토록 가슴에 품고 싶었던 저도 앞바다가 잔잔한 물결 위에 무지개빛 겨울 햇살을 살랑살랑 씻고 있다. 물결이 일렁거릴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뿜어내는 겨울 햇살이 눈 저리도록 아름답다.
거기 짭쪼름하면서도 향긋한 내음 풍기는 생굴이 붙어있다
저만치 푸른 바다 한가운데 하얀 스티로폼이 나란히 나란히 떠 있다. 저곳이 바로 미역과 김, 홍합, 굴 따위를 키우는 바다 어장이다. 어장을 관리하는 어부가 탄 작은 고깃배가 짙푸른 바다 위에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지나칠 때마다 바다의 어장도 덩달아 고운 파도를 너훌너훌 일으키며 부드럽게 춤춘다.
겨울 햇살이 잘 내리쬐는 저도 바닷가 바위 곳곳에서는 겨울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잔물결 구르는 바다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나그네가 다가가 "뭐가 좀 낚이나요?"라고 낚시꾼에게 묻자, "이곳 경치가 그만 아입니꺼, 그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재미 삼아 던져본 것뿐이지예"라고 말한다.
낚시꾼을 뒤로하고, 호수처럼 잔잔한 저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저도 연륙교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저만치 사람들 서넛 물 빠진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뾰쪽한 돌멩이로 생굴을 따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큼직한 바위 곳곳에 생굴이 따개비와 함께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나그네가 뭉텅한 돌멩이를 들고 굴 껍데기를 깨뜨리자 거기 생굴이 들어 있다.
생굴을 손으로 떼 티없이 맑은 바닷물에 설렁설렁 씻어 입에 넣자 짭쪼롬하면서도 향긋한 바다 내음이 입속 가득하다. 금방 딴 생굴에 소주 한 잔 곁들였으면 더 없이 좋았을 것을. 생굴 서너 개 더 따먹은 뒤 연륙교를 지나 저도로 들어가자 횟집들이 멍텅구리배 위에 고래등처럼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아무리 자주 와도, 늘 나그네의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저도 앞바다. 그래. 봄날씨처럼 포근하게 이어지는 올 겨울에는 저도 앞바다에 가서 은빛 윤슬 톡톡 터뜨리고 있는 남녘바다를 낚아보자. 더불어 바위틈 빼곡히 붙어 있는 자연산 생굴도 따자. 소주 한 병 들고 가면 더욱 멋진 여행이 되리라.
☞ 가는 길/ 1. 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마산 쪽 남해고속도로-내서-서마산 나들목-마산 해안도로-경남대-남부터미널-수정-구복-구복예술촌-저도 앞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