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한 영화나 화려한 의상과 배우들의 관습적인 몸짓으로 가득 찬 뮤지컬은 일상의 노동으로 지쳐 있는 현대인들에게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혼을 빼놓는 듯한 다채로운 무대와 비트 강한 감상적인 음악을 들으며 일상에서 강제된 의미망에서 벗어나 수다를 풀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연극들은 효용가치가 있다.
어떤 연극들은 인간의 심층의식과 사회의 심층구조를 다룬다. 이런 연극들은 관객들에게 ‘사유’를 떠넘기며 ‘해석’을 요청한다. 사유와 해석의 절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무대 위의 연극은 수수께끼로 기억될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심층구조를 파헤치려는 연극작품 속으로 몰입하면 할수록 사회에서 물림 받은 지식들의 효용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깊은' 연극은 관객에게 ‘회피 반응’을 끌어내거나 기꺼이 동참을 요구한 관객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한다.

아르또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듯이 연극을 보는 관객은 ‘정신분열’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분열 속에 생기는 틈이 변용이 싹트는 자리다. 희극은 익히 아는 것에 대한 유쾌한 반응을 끌어낸다. 그러나 비극은 ‘미지의 것’의 낯선 두려움을 형상화한다.
47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실험극단」의 159회 정기공연 작품으로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심판(The Trial)>은 요셉 K.란 남자의 생일날 싹트기 시작한 살해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독일어 제명은 ‘과정(Der Prozess)’이다. ‘부조리’의 과정보다 ‘과정’의 부조리에 무게가 쏠린다.
일상화법은 육하원칙의 기반 위에서 기능한다. 내가 혹은 당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왜 무엇 때문에 행하고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끝없는 헛소리와 간헐적인 섹스의 감창소리가 기계적인 사법 시스템의 철의 장막을 찢고 터져나올 뿐이다.
「극단동」의 <변신>은 ‘노동자’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분명 ‘노동요’를 부르며 살아있음을 감사하던 옛사람들의 정서와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삶은 피로함을 강요하고 피로함을 지우려고 삶을 산다. 노동에 대한 댓가는 형편없거나 상대적으로 형편없어 보인다.
‘섬유회사 외판업’을 하는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됨으로써 지긋지긋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지만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노동의 고역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비정(非情)한 소외감을 겪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원작은 그레고르 잠자가 죽은 것을 확인한 뒤에 아버지가 하숙인을 내쫓은 다음에 전철을 타고 외출하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때 자리에서 일어난 딸애가 활대처럼 팽팽해진 그 몸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금 생의 희망을 품게 된다.
연극 <변신>에서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딸과 모자의 먼지를 닦아주는 아내의 모습은 참으로 외설적이다. 가부장제의 동물적 근친성을 목격하는 듯 얼굴이 뜨거워진다.
또한 <변신>에서는 오빠-벌레에게 날선 언어를 내뱉던 딸과 아버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딸과의 포옹이 끝난 뒤에 잠자에게 ‘너가 조금만이라도 우리 마음을 헤아려줄 수 없겠니?’ 거푸 말하며 사실상 죽음을 강요한다.

카프카는 한 아포리즘에서 '자유란 하나의 출구’만을 의미할 뿐이라며 추상적이며 종교적인 자유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그레고르의 벌레-되기로서의 출구 찾기 드라마는 가정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공급원으로서 딸의 신체가 찬연한 햇볕 속에서 부각하는 순간 비극적인 결말에서 벗어나 ‘에너지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뻔한 질서 속으로 재편입되면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