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혼을 너에게 맡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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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시인 새 시집 <느릅나무에게>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피를 짜내는 듯한 혼신의 열정으로 시를 써내려가는 시인이 있다. 올해 여든 셋의 김규동 선생이 바로 그다. 얼마 전에 선생의 새 시집 <느릅나무에게>를 읽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가슴 서늘한 감동을 안겨다주는 시집이었다. 시집<생명의 노래>(한길사,1991) 이후 14년 만이다.

표제시에 나오는 '느릅나무'는 50년 전 선생이 고향 떠나올 때 작별한 고향집 우물가의 그 나무를 말한다. "어린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세찬 세월 이야기/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죽기 전에 못 가면/죽어서 날아가마"에서 볼 수 있듯, 시집 <느릅나무에게>는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우리 집 우물가의 장한 느릅나무
무섭도록 무럭무럭 자라
비 오는 밤이면
후두둑 머리를 풀어헤쳐
귀신처럼 어린 가슴을 조이게 하던
오, 수많은 전설을 지닌
외로운 그림자여 나무여

통일이 되면
너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그것이 마음에 걸려
너와의 대화를
미리부터 생각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고
두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의 혼을 너에게 맡기는 게 고작일 게다

나무여 나의 느릅나무여
이야기해다오
반백년에 걸친 그 많은 이야기를
나는 너에게 기대어
네가 하는 그리운 이야기를
황홀히 듣고만 있을 게다
온갖 슬픔과 시름을 누르고
네 정다운 이야기를
넋 나간 사람처럼 오래도록 듣고 섰을 게다.

- '그날에' 중에서

위 시에 덧붙여야할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다만 김규동 선생이 하루 빨리 고향 우물가의 그 느릅나무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김규동 선생의 새 시집 <느릅나무에게>에는 8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4년간 써온 3백여 편의 작품 가운데 시인이 직접 고르고 또 골라 83편으로 간추린 것이라 하니 선생의 시에 대한 개결함과 엄격함이 어떠한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첫 시집을 낸 지
쉰 해 가깝도록
그 빚을 갚지 못했다
시집이 팔리는 대로
수금을 해서는
박인환이랑 수영이랑 함께 술을 마셔버렸다
거짓말쟁이에게도
때로 눈물은 있다

- '추억' 전문

작품에 진술된 것처럼 김규동 시인은 '목마와 숙녀'를 쓴 시인 박인환과 60년대 최고의 참여시인 김수영과 친구 사이다. 한국 전쟁 직후 이들과 처음 동인 활동을 함께 할 때 김규동은 문명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나비와 광장'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후 김규동 시인의 작품은 북에 남겨두고 온 고향과 고향의 가족들, 특히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통일 지향의 문학으로 변모를 하게 된다. '아침의 편지' '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어떤 유언' '아, 통일' '누님' '죽여주옵소서'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노 시인의 꼿꼿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의 노래를 감동적으로 만날 수 있다.

김규동 시인은 14년 만에 펴낸 시집 <느릅나무에게>로 지난해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50여년 전, 첫 시집 낸다고 아내에게 진 빚을 이제 갚을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의 진정한 빚은 1948년 고향과 부모를 두고 월남하면서 갖게 된 마음의 빚이 아닐까.

그 빚은 '민족 분단'이라는 우리 모두의 빚이기도 하다. 빨리 통일이 되어 노시인 김규동 선생이 함경북도 종성 고향 마을로 찾아가 느릅나무에게 말을 건네며 실컷 눈물도 흘리며 목 놓아 '어머니'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꼭 와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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