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손에서는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생색 한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그 손이 요증 들어
희고 부드러운 손 앞에서 주눅 들어
자꾸 주머니 속으로 숨습니다
아내의 가슴을 보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거친
그 남자의 손이 가엾어 죽겠습니다
-28~29쪽, '그 남자의 손' 몇 토막
한미FTA 협상의 심장부 향해 날아가는 무기로서의 시
충남 태안에서 쌀농사와 소금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시인 정낙추의 첫 시집 <그 남자의 손>(애지)을 읽는다. 이 시집은 지난해 11월 끝자락에 나왔지만 글쓴이의 손에는 12월 초에 처음 쥐어졌다. 근데, 이제야 이 시집을 꺼내들고 꼼꼼하게 읽으며 이러쿵저러쿵 군더더기를 다는 까닭이 무어냐고?
시인 정낙추의 시에서는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난다. 그의 시에서는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가 잔뜩 배어 있다.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이다. 그 힘은 곧 우리 농민을 울리는 저 한미FTA 협상의 심장부를 향해 쌩 날아가는 무기로서의 시다.
사실, 정낙추는 지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문단 안팎을 뻔질나게 넘나들었던 글쓴이조차도 직접 만나보지는 못한 시인이다. 하지만 그의 시를 차분히 읽다 보면 요즈음 보기 드문 알짜배기 시인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채게 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그 남자의 손'은 시인의 할아버지, 아버지, 이웃집 농민들의 투박한 손이자 시인 자신의 고된 삶이다.
가운데 금이 그어진 보리쌀은 여자의 귀한 데를 닮았다?
"다섯 마리의 일소를 부리다가 푸줏간으로 보냈고 세 대의 경운기를 몰다가 고물상으로 넘겼다. 그래도 땅은 늙지 않는다. 이제 내 차례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쌀밥 한 그릇에 시원한 무국, 잘 익은 배추김치, 곰삭은 젓갈, 노릇노릇하게 구운 전어와 콩나물 무침에 된장찌개가 놓인 밥상 앞에 앉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시인 정낙추(57). "오십이 넘도록 내가 한 일은 쉬지 않고 먹을거리를 자루에 담는 것과 행여 그 자루를 채우지 못할까 조바심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일뿐"(커다란 자루)이었다고 고백하는 시인.
스스로 "자루의 노예, 길 잘 들여진 똥자루의 노예"였다고 자책하는 시인 정낙추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입맛이 몹시 쓰다. 그의 시에 담긴 농촌의 을씨년스런 풍경과 그의 시에 담긴 농민들의 고된 삶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자꾸 켕긴다. 끼니 때마다 농민들이 피땀 흘려 가꾼 음식을 먹으면서도 투정이나 하며 살아온 삶이 몹시 부끄러워진다.
쌀밥을 먹을 때마다 "세상천지 만물이 생겨날 때에 허투루 생긴 것 하나 없듯이 쌀도 마찬가지여"하는 정낙추 시인의 당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별미라며 보리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도 "가운데 금이 그어진 보리쌀 좀 보게나, 꼭 여자(女子)들 귀한 데 닮았지"하며 껄껄 웃고 있는 시인의 착한 눈빛이 어른거린다.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
봉지 속에
한 사내가 있다
꽃 떨어지자마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
얼마의 내공을 쌓았기에
독방에 갇혀서도
부처님 몸빛처럼 더 찬란할까
봉지를 벗기자
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빛에 튕겨 깨진다
몸 안 가득 채운
단물은
사내의 땀방울이다 그리움이다
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
눈물이다
눈물이 매달린 배 나뭇가지 사이에서
사내가
잘 익은 자기 얼굴을 웃으며 따고 있다
-10~11쪽, '득도' 모두
가을날, 봉지 속에서 황금빛 불상처럼 잘 익은 배를 하나 둘 따며 득도(得道)를 떠올리는 시인이 정낙추다. "꽃 떨어지자마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는 갓 열매를 맺은 배다. 하지만 봉지 속에 갇힌 그 배는 곧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왜? 그때부터 바쁜 농사일 때문에 꼼짝없이 농촌에 갇혀 농작물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렇게 봄과 여름, 가을 내내 땀을 흘리며 과수원을 돌보다가 늦가을이 되어 배를 수확을 해야만 비로소 농촌을 떠나 도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배나무 가지에 매달려 봉지를 쓴 채 영근 배 또한 독방(봉지)에서 엄청난 내공을 쌓아야만 "부처님 몸빛처럼 더 찬란"한 자신의 몸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배의 "몸 안 가득 채운/ 단물"은 곧 시인 자신이 그동안 흘린 땀방울이자 그리움이다. "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 눈물"은 곧 시인이 독방 같은 과수원에서 가까운 벗들에게조차 얼굴 한번 내밀지 못하고 세 계절을 단단하게 뭉친 사리다. 그 사리가 곧 득도를 한 황금빛 배로 영글었다.
피붙이 같은 농촌을 남에게 내어줄 수 없다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다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 할 테다
하늘은 맑은데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름달
물먹었다
올해도 물풍년은 틀림 없겠다
- 34~35쪽, '대보름' 몇 토막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농촌에는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날이 갈수록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던 마을사람들이 정든 고향과 제 살처럼 아끼던 논밭을 내팽개치고 도회지로 떠난다. 시인 신경림의 '겨울밤'이란 시에 나오는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한 살가운 풍경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는 끝없이 밀려드는 값 싼 수입 농산물과 끝없이 치솟아 오르는 기름값 때문이다. 게다가 한미FTA 협상은 그렇지 않아도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우리 농산물을 자식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등골을 더욱 휘어지게 만든다. 아무리 발버둥치면서 우리 농산물을 지키려 해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빚 때문에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물러설 수가 없다. 시인은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디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라며 혼자서라도 우리의 농촌과 우리의 농산물을 지킬 각오를 단단히 다진다. 정월 대보름 날,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하며, 올해 또 물풍년이 들어도 결코 피붙이 같은 우리의 농촌을 남(외국)에게 내어줄 수가 없다.
시인이 숫돌에 벼리는 낫은 식민의 역사를 베는 시의 낫
내 고향은 북아메리카
너희 나라 백성들이 똥구멍이 째지게 가난할 때
원조물자 밀이나 옥수수 틈에 끼어 와
이 땅에 자리 잡았네
이 땅에 자손을 퍼뜨린 지 반백 년
내 조국 아메리카가 부여한 임무를 잊지 않고
묵는 땅에 어김없이 뿌리를 박고 꽃을 피웠네
밀가루가 쌀을 몰아내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대한민국 전 국토가 흰 꽃으로 뒤덮을 날을 꿈꾸었네
오! 아름다운 대한민국
영원한 나의 땅
나의 식민지여!
-99~100쪽, '개망초 편지' 몇 토막
농민시인 정낙추의 첫 시집 <그 남자의 손>은 외래 동식물, 한미FTA 협상 등에 부대끼며 점점 식민화되어가는 우리 농촌의 속내를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 이른 새벽 숫돌에 벼린 낫과 메마른 논에 물꼬를 틔어주는 삽은 식민의 역사를 베는 시의 낫이자 한미FTA 협상의 물꼬를 단단하게 틀어막고자 하는 삽, 곧 우리 농촌의 자화상이다.
시인 이정록은 이번 시집 표4에서 "정낙추는 진짜 농사꾼이다, 주말에만 빠꿈히 흙을 찾는 농사체험가가 아니란 말이다"며, "시집을 낸 적 없으나 사람들은 그를 큰 시인으로 우러렀고, 수렁배미와 개펄에서 늘 소금꽃이나 피우고 있었건만 우리들은 그를 당대의 어른으로 여겨왔다"고 말했다.
시인 정낙추는 1950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1989년부터 <흙빛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있으며, 2002년 (사)민족문학작가회의 기관지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고향인 태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시인은 서해 뻘물을 끓여 만드는 우리의 전통 소금인 자염을 만드는 소금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