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훌훌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 '시인의 비명(碑銘)' 전문.
1936년 <시인부락>에 발표된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시인의 비명(碑銘)'은 이 땅의 참교육 실현을 위해 일생을 내던진 교육자로서, 조국의 아픔에 동참하며 평생 길 위에서 살아온 분단시대 시인으로서의 배창환의 삶이 오롯이 실려 있는 작품이다.
함형수의 작품이 부제(副題)에서 드러나듯 청년화가 L의 삶을 그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배창환의 시는 시인 자신의 삶이 그것이다. 그만큼 시의 내용이 엄숙하고 진정성이 넘쳐난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은 배창환의 삶과 문학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십여 년 전, 배창환 시인은 복잡한 도시(대구)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인 가야산 아래 경북 성주군 대가면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겨울 가야산>은 고향을 지키고 있는 가야산이 일러주는 삶의 지혜를, 산 아래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농민들과 몇 명 남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정성과 따스한 서정의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기에 결코 "쉽게 살지 않는다"('가야산 시') 또 "언제쯤일까, 저 산과 내가 가장 닮아 있을 때는"이라는 바람의 시구에서 보듯 "쩡쩡한 얼음 속처럼 금세 튀어올라/곡괭이로 깡깡 쳐보면 따뜻한 생피가 금세 튀어올라" 올 "저 산의 뿌리"(「겨울 가야산」)를 닮고자 한다.
겨우내 우리 아이들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없어졌다. 폐교된 지 이태 만에 불도저로 밀고 덤프트럭이 와서 학교를 실어갔다. 운동장엔 아직 민들레 한 포기도 비치지 않는 너무 이른 봄, 아이들은 벌써 이웃 학교로 떠난 지 오래, 홀로 쓸쓸히 낡아가던 교문도, 교문 오르는 비탈길에 학교보다 백 년은 더 된 느티 고목도 싹둑 베어지고 없다.
운동장에 즐비하던 플라타너스, 일찍이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커서 아이를 낳아 이 학교에 보내고, 운동회 날 선생님 대접한다고 돼지 잡고 국 끓여 대낮부터 막걸리 콸콸 따라 동네잔치 하던 그 플라타너스 짙은 그늘도, 그대 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꽃동산도 화산이 불을 뿜던 지층 파노라마도 축구 골대도 둥근 시계탑도, 하얗게 빛나던 백엽상도 학교 교사(校舍) 앞에서 구름이나 산새들을 불러 모으던 허리 굽은 적송 한 그루도, 아이들 깨금발로 오르내리며 놀던 돌계단도 밤낮으로 펄럭이던 태극기도 이젠 없다.
썰렁한 운동장엔 인근 숲에서 불어드는 드센 바람만 무성한데, 어린 플라타너스 잘린 몸뚱어리 몇 뒹굴고 있어 가만 들여다보니 수십 개의 둥근 별자리가 성성 박혀 있다. 나는 그 어린 등걸을 안고, 지나가는 바람이 듣지 못하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얘야, 여긴 너무 쓸쓸해서 안 되겠다
우리 집에 가자
- '우리 집에 가자' 전문.
부정형의 종결 어미 "없어졌다, 베어지고 없다, 보이지 않는다, 이젠 없다" 등으로 서술되고 있는 폐교된 운동장에 상처투성이의 어깨를 하고 있는 어린 플라타너스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시리고 아리게 한다.
마치 결딴나버린 우리 시대의 농민들의 초라한 형상 같기도 하다. 2연의 시적 화자(시인 자신)의 저 아버지 같은, 선생님 같은 목소리가 있어 우리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겠다. 새 삶을 붙잡으려 들메끈을 동여맬 수 있겠다. 시집 말미에 "내 시는 아직도, 나와 함께/길 위에 있다."는 '시인의 말'이 겨울 가야산의 솔잎처럼 푸르고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