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같은 세상 속으로 흔들흔들 걸어갈 거야
거울 같은 세상 속으로 흔들흔들 걸어갈 거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정민 유고시집 <망가진 기타>

난 살 거야 이 흔들림을
뻣뻣한 모가지 비뚤어진 표정이 싫어서
찍지 않았던 사진도
즐거이 찍으며
여인아, 이제 오랜 손때로 반질거리는
내 사랑도 보여주며
다만 가슴만 쥐어뜯는 밤이 아니라
대낮 어지러움 속을 걸어가듯
내가 마주 보아야 할 고통의
거울 같은 세상 속으로
흔들흔들 걸어갈 거야
- 16쪽, '서시' 모두

'포치'로 불린 뇌성마비 젊은 문학도의 아픈 삶

지난 2005년 6월 5일, 뇌성마비로 인해 퇴근길에 쓰러졌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고 서정민의 유고시집 <망가진 기타>(삶이 보이는 창)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끝자락에 나온 이 시집에는 타고날 때부터 장애를 안은 채 짧은 삶을 시와 뒹굴며 살아낸 한 젊은 문학도의 아픈 삶과 시인을 향한 푸른 꿈이 서려 있다.

'메주', '창원대학교 1,2', '배반의 추억', '모닥불 가에서', '깡통차기', '신포나루', '저녁달', '담배', '원전에서', '소를 타고 1,2', '세상 속의 집', '땡초', '갈치와 나', '동백꽃 자리', '방울뱀 1,2', '망치', '붕어빵', '망가지는 이유', '어느 쇠잡이에게', '겨울밤', '자장가', '안경', '다리', 다산초당에 가서', '밑살' 등 77편이 그것.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 옆에서 부축이라도 할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물리쳤습니다. 먼저 올라가거나 먼저 내려간 동행들이 기다리는 것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포치는, 자기를 기다리지 않기 위해 걸음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추어 '나란히 걷는 법'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유고시집 발간에 부쳐' 몇 토막

'고 서정민 시인 유고시집 발간준비위원회'는 이번 시집의 머리말에서 "그를 우리는 '포치'라 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왜? 고 서정민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술자리에서나 식사자리에서 안주나 반찬을 자기 앞으로 끌어대는 품이 마치 굴삭기를 닮았다 하여 애칭으로 부르게 된 거"란다. 이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그의 삶이 그만큼 팍팍했다는 말이다.

시를 쓰며 '운명의 코드'를 바꾸고 싶었던 장애시인

난 망가진 가타
빛나는 노래의
오래 울리는 배음이 되고 싶었네

머릿속의 완벽한 선율을 따라
속주로 이륙하고 싶었네
운명의 코드를 바꾸고 싶었네

남은 현들을 힘껏 조여 보는 거야
먼지를 잠 깨워 춤추게 하고
통쾌한 달을 쏘아 올려서
밤하늘 가득
별들의 박수소리를 들어보는 거야

난 망가진 기타
고요가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지닌 모든 불협화음으로
징징 울어보는 거야
- 65쪽, '망가진 기타 1' 모두

여기, 뇌성마비 장애를 천형처럼 안고 태어나 자신의 불행한 육체적 삶을 시에 녹여내며 꿋꿋하게 살아낸 한 젊은 문학도가 있다. 망가진 기타처럼 망가진 몸으로도 마음속에 새로운 삶의 나무를 키우다가 그 나무가 마악 도톰한 시의 꽃봉오리를 밀어 올릴 때쯤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슬픈 영혼이 있다.

서정민(1967~2005). 38년의 짧은 생애 동안 망가진 기타의 "남은 현들을 힘껏 조여.../ 고요가 나를 삼카기 전에/ 내가 지닌 모든 불협화음으로/ 징징 울어보"고 싶었던 그. 신체적인 불협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대학을 다녔고, 졸업한 뒤에는 공무원으로 살면서 가족의 식의주까지 책임졌던 그.

하지만 그는 죽는 그날까지도 시인으로 살고 싶었다. 시가 비록 밥은 되지 못했지만 시가 그의 신체적 장애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었고, 시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의 나날들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시는 그 자신의 삶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의사이자 무한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정신적 주춧돌이었다.

메주처럼 다시 태어나고 싶다

꿈꾸지 말자
그 여름 후끈거리는 대지를 꿰뚫고 솟아오르던
우리들의 치기는, 오만은
이미 삶겨지고
절구통 속에서 철저히 짓이겨지지 않았느냐

이제 내 몸은 굳어져
마산시 화영동 1-5 서봉기 씨 집 골방에서
퀴퀴한 곰팡이와 더불어 잠이 들지만
얼음 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이 밤에도
가슴은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불타오른다
- 19쪽, '메주' 몇 토막

살아생전, 자신처럼 뇌성마비를 앓으면서도 환경과 통일, 지구촌의 생명과 평화를 평생 화두로 삼아 뛰어난 시를 발표했던 마산의 이선관(1942~2006) 시인을 가장 존경했다는 젊은 문학도 서정민. 그래서일까. 서정민의 시 곳곳에서도 이선관 시인처럼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은유적으로 드러낸 시가 여러 편 있다.

"제 속을 오래 들여다보며 되새김질하는/ 순한 소 울음 하나 품고"(징)나 "앞서가는 달빛도 절름거리고요... 다들 그 사이를/ 출렁출렁 걸어가겠지요"(귀가), "군데군데 얼룩으로 남은 풋감물을 아직도 벗지 못했다"(풋감), "헌 슬픔이 새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면/ 새 슬픔이 헌 슬픔을 밀고 간다"(강물) 등이 그러하다.

그 중 '메주'란 시는 이 세상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슬픔과 그 큰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서정민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콩은 갓 태어난 서정민 자신이다. 그리고 콩이 꼬투리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가마솥에 삶기고 절구통에서 마구 짓이겨져 태어나는 '메주'는 장애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며 거듭나는 서정민이다.

그는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다시 살고 있다

"며칠째 잊어먹고 그냥 놔둔 갈치를 꺼내 놓으니
파랗고 하얀 곰팡이를 피워내며 썩어가고 있었다
...팽개쳐둔 나는 얼마나 지독한 냄새를 풍길까
비누로 두 번 씻은 손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갈치 냄새
- 73쪽, '갈치와 나' 모두

<망가진 기타>에는 뇌성마비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시인으로 살고 싶어 했던 고 서정민의 고단한 삶과 슬픈 운명의 동아줄이 외롭게 흔들리고 있다. 비록 몸은 부자유스러웠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던 그. 이제 그의 영혼은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이 세상을 다시 살고 있다.

고 서정민 시인은 1967년 마산에서 태어나 1973년 홍익재활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1987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학생운동과 민속, 민중예술, 문예창작활동을 했다. 1999년에는 장애인 특채로 남해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공무원노조 활동을 했으며, 2001년 1월부터 마산시 오동동 사무소에서 일했다.

2004년 7월, 마산시청 사회복지과로 옮긴 그는 시창작을 하면서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을 쓰는 등 활발한 문예창작활동을 펼치다가 2005년 3월 3일 퇴근길에 넘어져 마산의료원, 부산 백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손발 마비 증상과 걸음걸이 장애가 심해져 마산 삼성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2005년 6월 5일 눈을 감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