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강의 역사에서 거론되는 독보적인 존재가 있다면 바로 포스코다. 공기업 포항제철로 시작된 철강의 역사는 현재 포스코에 이르기까지 철강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신화가 됐다. 특히 포항제철의 창업주였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정치권을 두루 거친 전적에도 아직까지 ‘철강왕’으로 통한다. 박태준 명예회장에서 현재 이구택 회장에 이르기까지 <시사신문>이 포스코의 어제와 오늘을 좆아봤다.
팔순 맞았지만 건제한 영향력 과시하는 ‘철강왕’ 박태준 명예회장
‘샐러리맨 신화’ 이구택 회장 국내 철강의 성장에 독보적인 역할
지난해 11월 신라호텔에서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80세 생일을 맞아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명박·정동영 의원을 비롯해 박희태·김근태 의원, 이구택 포스코 회장,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등 정계 및 재계 인사 3백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아직도 건제한 박태준 명예회장의 막대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리도 아니다. 그의 별칭은 ‘철강왕’ 지금은 민영화가 된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의 창업주다. 때문에 포스코의 역사에는 박 명예회장이 빠지지 않는다.
포스코의 역사 박태준 명예회장

포스코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1968년 탄생했다. 7천3백70만달러와 일본상업은행 차관 5천만달러를 합친 1억2천3백70만달러가 투입된 것이다. 이에 박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선조들의 핏값으로 짓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산업의 기초소재인 철강재로 40년간 한국경제를 뒷받침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부정권과 연계된 개발독재라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철강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유래 없는 초고속 공업화를 성공시킨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안이다. 포스코는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려나갔다. 1973년 44만9천t이던 조강(粗鋼) 생산량은 2006년에는 3천5만t으로 불어났다. 조강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4위의 초대형 철강사다. 매출액은 1973년 4백16억원에서 2006년에 20조4백3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1995년 뉴욕증시, 1996년 런던증시, 2005년 도쿄증시 등 세계 3대 증시에 상장되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철강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갖췄다.
포항제철이 오늘의 포스코가 된 것은 2000년 10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이 전량 이 매각되면서 민영화 되면서다. 2002년에는 사명을 포스코로 바꾸고 민영화로 새로 태어났다.
민영화 이후 기술 개발 실적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개발에 주력한 파이넥스(FINEX) 공법이 2000년대 초 선진 철강사보다 한발 앞서 150만t 상용화 설비에 적용됐다. 파이넥스 공법은 코크스가 필요없고, 점결성 없는 일반탄을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2007년 5월 세계 최초의 상용화 설비가 완공되며 제강 능력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서 있음을 다시금 증명했다. 심지어 투자의 귀재로 통하는 워런 버핏이 포스코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 워런 버핏은 지난해 방한 중 “10년 20년 뒤에도 포스코의 전망은 밝다”고 말해서 투자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하지만 포스코 성장과는 달리 박 명예회장의 말년은 썩 순탄치 못했다. 사실 박 명예회장은 안 거친 고위직이 없을 만큼 두루 거친 인사다. 대통령만 빼고 다 해봤다고 할 정도다. 박 명예회장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 경제분과 위원장을 거쳐 1981년 11대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 입문했다. 이후 13대와 14, 15대 국회에 진출하며 5·6공 때 탄탄대로를 달렸다. 하지만 1993년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되며 포항제철 명예회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자민련 총재 ‘DJT 연대’에 참여해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2000년 국무총리가 된지 4개월만에 부동산명의신탁 파문이 세무조사를 통해 밝혀지며 정계에서 쓸쓸한 퇴장을 맞았다. 심지어 2001년에는 가슴에 물혹이 생겨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공직 사퇴 이후 공식활동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암암리에 이구택 포스코 회장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측근의 설명이다. 특히 지난해 7월 포스코 포항 본사가 포항지역 전문건설노조원들에게 점거됐을 때도 이 회장은 박 명예회장에게 전화를 해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이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됐다”고 회고 할 정도.
샐러리맨의 신화 이구택 회장
특히 이구택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로 재계에서 유명하다. 그는 1969년 공채 1기로 포항제철에 입사해 제철소 등 현장뿐만 아니라 기획부서 등을 두루 거치며 포스코의 최고경영자에까지 올랐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1980년대부터 이 회장을 ‘미래의 CEO’로 일찌감치 점찍었다고 할 정도다. 실제 이 회장의 전적은 양호하다.
올 들어 철강 제품 가격은 하락했지만 포스코의 순이익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지난해보다 영업이익은 17%, 순이익은 21% 증가했다. 이 회장이 지난해부터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건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노력이 주효한 덕분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는 포스코가 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혁신 활동에 대해 “등산으로 치면 이제 겨우 3부 능선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한다.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3부 능선에서 8부 능선까지 이어지는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 회장은 포스코의 글로벌 시대를 개막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는 “철강 산업이 국제화된 상황에서 아시아 이외 지역의 판매 비중이 5%를 넘지 못하면 포스코가 국제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글로벌 진출의 고삐를 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