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란 어휘가 근대이후 한세기가 지나고 새천년을 맞고도 명확한 자리매김을 못한 채 중음신(中陰神)으로 민족문학사의 광야를 떠돌도록 만든 건 수치스런 일이다. 지금도 이 술어만 등장하면 8.15 직후 좌우익의 살벌한 대립상을 연상하며 엄청난 '숙청의 태풍'이라도 몰고 올 듯이 전울한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띄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 국민의 친일'의 논리를 동원한다.
그러나 8.15 직후나 지금이나 친일파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평가는 그렇게 피비린내나는 살벌성이 아니라 미래지향성 좌표도로서 극소수에 한정된 친일파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전제 삼아야 한다. 누구나 친일파가 아니라, 막연하고 사소하며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억울한 다수의 피해자를 확실히 변별하여 올바른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자는 것이 친일파 연구의 향방인 것이다.
미세한 자료 한 둘을 발견하여 호들갑스럽게 '친일파'로 몰아대는 자세는 바람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체성 추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친일 행각은 다른 분야보다 억울한 누명을 쓸 수밖에 없는 불리한 요인이 강한데, 그건 명백한 증거물이 될 '작품'을 남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친일 연설을 했대도 저명인이 아니면 아예 기록도 없건만 문학은 글이라는 증거품을 남기게 되기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악질 고문 형사나 밀정 등은 그 해악에서 문학예술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지극히 대표적인 몇몇 인물만이 친일파로 거론되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더구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친일파는 가장 열심히 연구되어 샅샅히 뒤져온 터라 웬만큼 밝혀졌다는 사실도 한 몫 한다.
친일에 관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친일파 규정에 대한 명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따라야 한나듣 사실을 밝히고자 함에서 하는 말이다.

친일파의 정의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있기에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관심있는 분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은 <친일파란 무었인가>(아세아문화사)를 참고하면 될 터이다. 이 저서는 해방 초기의 각 정파, 사회단체가 주장했던 친일파 규정부터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 처벌법'의 규정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기에 가히 망라된 개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법 중 문학예술에 속하는 조문은 제4조 11의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일 것이다.
물론 이 조문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개략적인 친일 예술인의 판단 기준을 담아내는 데는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 법 조차도 시행될 수 없었던 저간의 정황과, 그런 가운데 문학예술인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연구가 이뤄졌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8.15 이후의 행적을 반드시 참작해야 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1) 8.15 이후에도 여전히 친일파들이 집결했던 정파나 단체에 가담하여 친일파 청산을 용공으로 비판하며, 어제까지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친미주의자로 변신하는 등 반역사적인 행위를 했던가, (2) 분단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 독재정권-박정희 군부독재-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에 적극 협력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비난했던가, (3)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에 회의 혹은 반대하며 이를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매도했던가 등이 반드시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친일파가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의 촉구와 비판이면서도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진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샤르트르는 프랑스 해방 직후 <협력자는 무엇인가>란 글에서 단순한 친독 행위 그 자체에 못지 않게 반민주주의, 국수주의, 나치 사상, 침략주의 등등 사상사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반대한 왕당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진정한 친독파의 사상적 뿌리가 밝혀진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는데.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이다.
사실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규정은 제2차대전 종료 후 시행되었던 전쟁범죄 처리 기준에 따라야 할 것이다. 즉 (1) 전쟁을 찬양 고무 선동한 전쟁에 대한 범죄, (2) 독재체제나 침략주의 사상을 고무한 평화에 대한 범죄, (3) 휴머니즘의 기본 이념을 등진 인도(人道)에 대한 범죄를 참작하여 냉혹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친일파란 단순하게 일본 침략주의의 찬양이란 차원이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는 이 세가지 뿌리에서 돋아난 일체의 반역사적, 반민족적,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