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쉰다
괴물 같은 기계가 숨죽은 것같이 쉰다
우리 손이 팔짱을 끼니
돌아가던 수천 기계도 명령대로 일제히 쉰다
偉大(위대)도 하다 우리의 xx력!
왜 너희들은 못 돌리나?
낡은 명주같이 풀죽은
백랍같이 하얀
고기 기름이 떨어지는 그 손으로는
돌리지 못하겠니?
너희들에게는 여송연 한 개 값도
우리한테는 하루 먹을 쌀값도 안 되는 그 돈 때문에
동녘 하늘이 아직 어두운 찬 새벽부터
언 저녁별이 반짝일 때까지 돌리는 기계
(권환 '停止(정지)한 機械(기계)-어느 공장 xxx 형제들의 부르는 노래' 몇 토막)
지난 1988년 6월,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창립한 '구로노동자문학회'. 그동안 현장노동문예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며 나름대로 알찬 수확을 거두어 온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아 노동시선집 <한국대표노동시집>(도서출판 b)을 펴냈다.
"예로부터 일과 놀이는 하나였다고 한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그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일(노동)과 놀이(예술)는 점점 분화되어 갔다...오늘날 시는 일과 분리된 채 노동의 의의를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많은 시인들이 그 잃어버린 노동의 참된 의의를 되찾기 위하여 시 속에서 부단한 노동의 가치와 리듬을 추구하였다."('책 머리말' 몇 토막)
문학평론가 김윤태와 시인 맹문재, 시인 박영근, 시인 조기조가 공동으로 해당시인과 시를 가려뽑고 편집한 이 노동시집은 1920년대부터 2003년까지, 거의 1백여 년에 걸쳐 활동한 시인 241명의 시 423편을 모두 3부에 나눠 담고 있다.
제1부는 1920년대부터 1950년까지 활동한 시인 박팔양, 권환, 임화, 김명순, 윤곤강을 비롯한 44명의 시가, 제2부 1951년부터 1980년까지에는 고은, 신경림, 김남주, 이선관, 홍일선을 비롯한 53명의 시가, 제3부 1981년부터 2003년까지에는 박노해, 백무산, 이소리, 정인화, 김해화 등의 시가 실려 있다.
"한국 근현대시 100년을 아우르거나 그 다양한 면모들을 가려 뽑은 '대표시선집'은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 100년의 역사를 '우리 식으로', 다시 말해 '노동자의 눈'을 통해 새롭게 읽어보고자 시도한 것이다."('머리말' 몇 토막)
핏발이 섰다 집마다 집웅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위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핏발이 섰다
누구를 위한 철도냐 누구를 위해 동트는 새벽이었냐 멈춰라 어둠을 뚫고 불을 뿜으며 달려온 우리의 기관차 이제 또한 우리를 좀먹는 놈들의 창고와 창고 사이에만 늘어놓은 철길이라면 차라리 우리의 가슴에 안해와 어린것들 가슴팍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자
(이용악 '기관구(機關區)에서-남조선 철도파업단에 드리는 노래' 몇 토막)
그래. 과연 "누구를 위한 철도"였겠는가.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동 트는 이른 새벽에도 마다않고 기관차를 끌었겠는가. 그리고 기관차는 누구를 위해 "어둠을 뚫고 불을 뿜으며" 방방곡곡을 누볐겠는가. 철도 노동자들의 임금을 벌레처럼 "좀먹는 놈들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
"제2부는 1951년부터 1980년까지로, 이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냉전/반공이데올로기와 개발독재의 억압 아래 노동시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1970년대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고통 받는 노동자의 삶이 다시 포착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 오고 있는가
그대 힘없이 돌아서는 저녁논
지난 봄에 빌려온 농자금
갚을 길 없어 한숨 너머 슬픔 너머
지금 오고 있는가
모두들 떠나 쓸쓸한 저녁
백날 노동에 지친 그대
한밑천 잡아 장가도 들고
소도 한 마리 사갖고 온다더니
(홍일선 '석우리 23' 몇 토막)
이 시는 6~70년대 우리 농촌의 암울하고도 절망적인 현실을 사실 그대로 잘 드러낸 시다. 그야말로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들은 해마다 다가오는 보릿고개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게다가 추수를 마쳐도 빌린 농자금을 갚을 길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갈라먹기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도시를 향해 떠난다. 그리고 일부는 아예 빚 때문에 야반도주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농촌을 버리고 떠난 그들은 대부분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쓸쓸히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는 도시나 농촌이나 매 한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몇 토막)
그러한 고된 삶은 공장에 취직을 한 농민의 아들 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현실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더이상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분노를 삭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난의 뿌리인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하나 둘 끊어내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그날을 기다리며, 아니 그날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끌어당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료 노동자들과 굳세게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을 흘리며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가열찬 투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노동시는 마치 한때의 포말적인 현상이거나 특정계층 출신들만의 전유물쯤으로 여기는 풍조가 없지 않다…이 시선집이 새로운 세기를 맞아 새로운 삶과 문학을 추구하는 많은 미래의 시인들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서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구로노동자문학회가 펴낸 <한국대표노동시집> 속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여러 시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다양하게 실려져 있어, 한국 노동시 100년의 흐름을 한눈에 짚어볼 수가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널리 알려진 노동시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노동시를 싣지 못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