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뉴요커"
"하나의 빌딩 뒤에 두 개의 빌딩이 겹쳐 있고 그 각각의 뒤에는 또 다른 빌딩이 겹쳐 있다. 겹겹이 들어선 빌딩숲 앞에는 또 공원이 겹쳐 있다. 백만장자가 지나간 자리에 거지가 누워 있고, 형광등 불빛이 사나운 대형 상점 옆네는 주인의 땀냄새가 진동하는 구멍가게가 있다. 어지러운 겹침 속에서 뭔가를 찾아나가야 하는 삶이 뉴욕의 삶이고 뉴요커의 숙명이다."
박상미의 에세이 "뉴요커"의, 비교적 앞머리 즈음에 등장한 단락이다. 이처럼 명확하게 혼란스럽고, 또 그 혼란 속에서 나름의 균형을 만들어가는 현대 대도시의 풍경을 담아낸 문장은 참 오랜만인데, 대부분이 도시의 얼토당토 않은 낭만이나 인정, 또는 과도하리만치 냉소를 뿜어내는 각박한 묘사 등에 지쳐있던 이들에게, 박상미가 전해 주는 뉴욕과 뉴오커들의 모습은 '도시'와 '도시인'이라는 오래된 명제에 신선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을 듯.
여기서 잠시 "뉴요커"의 작가 박상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서울 태생으로 연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한 그녀는, 뉴욕 시립대와 뉴욕 스튜디오 스쿨, 움브리아의 미술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인물이다. 그러나 미술사 공부를 중단하고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박상미는 사람의 옆모습, 뒷모습, 걸음걸이 등, 한 인간의 물리적 존재감을 구성하는 요인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런 그녀의 관심사는 글로도 전이되어, "뉴요커"에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옆모습, 뒷모습, 그리고 그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서사적 느낌을 지운 '순간 포착'의 분위기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박상미는 "뉴요커"를 3부로 나누고 있다. 먼저, 제 1부 '뉴욕 뉴욕'은 '뉴요커'의 정체성과 뉴욕이라는 도시가 지닌 매력을 서술하고 있다. 영화 감독 우디 앨런이 바라본 '맨해튼'에 대한 서술로부터 시작해, 멀티미디어 디자니오 '옥타비오'와 함께 맨해튼을 걸으며 보았던 풍경과 감상들, '미니어처 뉴욕'이라는 칭하는 '스트랜드 북스토어'에 대한 묘사, 그리고 '예술가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아야 하나'까지 묻고 있는 그녀는, 얼핏 소녀적 감수성이 드러난 경수필의 얄팍한 영역을 건드리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감수성에 기대지 않고 '도시'라는 명제와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큰 틀 안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풀어놓아 한층 세련되고 복합적인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어지는 제 2부 '뉴욕 그리고 예술'은, 타이틀 그대로 작가 자신이 매료되어 있는 화가와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단순한 작품, 작가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는 과연 누구인지 묻고,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친 현대미술가 '호퍼'에 대한 애정을 남다르게 표현하는 등,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감상문'식 넋두리에서 효율적으로 벗어나고 있다.
마지막 제 3부는, 드디어 실제 뉴요커들의 삶의 방식과 뒷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뉴요커 스토리'. 자신의 작업실을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이 이름이 '상미'에서 '미미'로 바뀌게 된 사연, 맨해튼 서점 산책기 등 개인사적인 영역에서 시작하고 있는 제 3부는, '일기장'적인 "뉴요커"의 성격이 극대화되어 있는 파트이기도 하다. 자신이 자주 가는 음식점 소개, 자신의 '고독할 때' 찾는 곳 등을 소개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연 "뉴요커"라는 책이 '뉴욕'에 대한 소개인지, '뉴요커'에 대한 탐구인지, 아니면 '박상미라는 개인의 감수성과 취향'에 대한 보고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데, "뉴요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이 '혼란스럽고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양상' 그 자체에 있다.
이 책은 '박상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뉴욕에서 살아가고 있는 박상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뉴욕에서 박상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뉴요커'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박상미를 비롯한 여러 뉴요커들을 함께 끌어안고 있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책의 어느 지점에서 이런 고백을 남기고 있다.
"뉴욕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혼자가 좋다. 혼자 헤매고 다니다보면 쇼윈도에 내 코트 자락이 무슨 검은 매의 날개나 되는 것처럼 휙 날리는 것이 비칠 때가 있다. 내 존재에 대한 도시의 화답. 그럴 때면 빌딩 사이에서 또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리는 것 같다. "뉴욕이라는 정글의 공기를 마시는 한, 너의 '야생'의 정신을 안락한 삶 속에 가두지 말지어다.""
박상미는 '뉴욕에 빠져있는 뉴요커'이다. 그리고 뉴욕 속에서 '야성'을 발견하고 있는, 기묘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뉴욕이라는 공간에의 '미학'은 너무나도 경쾌하고 세심해서, 비록 '뉴욕에 직접 갔다 온' 기분까지는 들지 않더라도,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와 밤새도록 통화하며 그 도시를 짐작해보는 것 정도는 훨씬 뛰어넘는, 기묘한 종류의 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뉴요커"는 앞서 소개한 저자의 산문 31편과 함께, 자신이 촬영한 사진 한 편과 그림 자료 86점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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