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마산 앞 바다는 더러웠다. 갖은 오물들이 바다 여기저기를 떠다녔다. 그래도 누구 하나 그것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검었다. 폐수가 흘러든 바다는 항상 악취를 풍기곤 했다. 하긴 그랬을 것이다.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공업도시 마산이 아니었던가.
70, 80년대는 마산의 전성기였다. 많은 여성들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주로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에 취직을 했다. 출근하는 아침이면 그 일대는 사람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열에 아홉은 여자였다. 그만큼 여자가 많았다.
나는 오랜만에 동생이 경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동생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내가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어째 손님이 없구나?”
“응, 우리는 배달 전문이야. 여기는 아파트 밀집지역이라 실내 손님이 별로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동생이 소주를 내왔다. 나는 소주를 따랐다. 한숨에 잔을 들이켰다. 속이 싸했다. 이번에는 동생이 소주를 잔을 따랐다. 그 잔 역시 단숨에 비웠다. 동생이 말렸다. 급히 마시면 취한다고 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취하지 않아. 설령 취하면 어때서. 내 동생이 있는데….”
동생은 웃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아구찜’을 내왔다. 짭짤해서 좋았다. 미더덕도 간혹 보였다.
“너는 미더덕찜을 참 잘했지. 나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어. 그때 너는 졸린 눈으로 내 밥상을 챙기곤 했지. 나는 지금도 그게 마음이 아파!”
나는 그럭저럭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취기가 올랐다. 동생이 복국을 내왔다. 나는 복국을 통째로 들이켰다. 시원했다. 나는 동생을 보았다. 많이 늙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나와 세 살 터울이니 동생 역시 40대 초반이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말했다.
“너는 참 고생을 많이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너는 죽도록 일만 했어. 너는 우리 집 막내였지. 한창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할 나이였어.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지. 너는 언제나 직장을 찾아다녀야 했지. 너는 돈을 벌어야 했어. 내 학비를 벌어야 했단 말이야!”
나는 끝내 울먹이고 말았다. 그런 나를 동생이 다독거렸다.
“나는 공부를 싫어했잖아. 그래서 일찍 취직을 한 거야.”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동생은 머리가 좋았다. 이해력도 좋았고, 순발력도 뛰어났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시곤 했다.
“저 아이가 배웠으면 한 자리 했을 거야. 저렇게 머리 좋은 아이를 가르치지 않았으니….”
나는 식당을 나섰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동생은 잘 이겨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나는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제야 동생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노래도 불렀다. 내 집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왔지만 나는 타지 않았다. 술에 취해 걷는 기분, 그 기분에 취해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봉투였다. 그제야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동생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새하가 공부를 잘한다지. 자주 못 가 봐서 미안해. 이거 얼마 되지 않지만 학용품 사는데 보태 써.”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동생에게 음식값도 주지 않았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살았다. 항상 빚만 지고 살았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미안하다, 내 사랑하는 동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