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화는 '소나무 문화'?
사시사철 푸르고 뾰쪽한 잎사귀를 가진 소나무는 예로부터 씩씩한 기상과 곧은 절개, 지조, 장수, 성실, 생명, 순결 등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더불어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이므로 우리 조상들은 장수를 기리는 해와 산, 물, 돌,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과 함께 십장생의 하나로 삼았다.
다른 나무들이 자라기 힘든 거친 땅이나 흙 한 줌 없는 바위 위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자라는 소나무를 대나무와 함께 '송죽지절'(松竹之節, 변하지 않는 절개)이라고 한 것이나 '송교지수'(松喬之壽, 인품이 뛰어나고 오래 사는 사람)라 부르며, 마을의 안녕과 장수를 바라는 장승의 재료로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소나무는 여러 건축물의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뿐만 아니라 관 및 배를 만드는 재료로도 쓰였다. 특히 태백산 줄기에서 자라는 중곰솔은 재질이 아주 좋아 가구재료와 생활용품은 물론 농기구재료와 약재, 땔감 등으로 이용되었다. 오죽 소나무가 널리 쓰였으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문화를 보고 '소나무문화'라고까지 했겠는가.
소나무는 식재 및 약재로도 훌륭하게 쓰였다. 옛말에 송진을 100일 이상 먹으면 배고픔을 모르고, 1년 동안 먹으면 100살 난 젊은이도 30살의 청년처럼 젊어지며 오래 산다고 했다. 더불어 잎 말린 것은 송엽(松葉), 꽃가루 말린 것은 송화(松花), 송진을 긁어 모아 말린 것을 송지(松脂)라 하여 약재로 널리 쓰인 것은 물론 송화주나 솔잎차로도 즐겨 마셨다.
광복 되던 그 해, 성황리에 있는 두 소나무 가지가 맞닿았다?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대략 다섯 가지다. 몸통이 붉고 곧은 '강송'(금강송, 춘양목), 바닷가 강한 소금기에도 잘 견디는 '곰솔'(해송), 가지가 쟁반처럼 퍼져 조경수로 사용하는 '반송', 잎이 세 갈래로 껍질이 희끗희끗한 '백송', 잎이 세 갈래로 몸통에 털이 나듯 잎이 듬성듬성 나는 '리기다 소나무'(외래종)가 그것.
그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는 서울 재동의 백송(천연기념물 8호),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 운문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180호), 합천 묘산면 소나무 (천연기념물 289호), 문경 농암면 반송(천연기념믈 292호), 괴산 청천면 소나무(천연기념물 290호), 의령 성황리 소나무(천연기념물 359호),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409호)가 있다.
이들은 모두 수령이 200~600년 정도 된 소나무들이다. 그중 천연기념물 제359호(1988년 4월 30일)로 지정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 마을 뒷산에 있는 '성황리 소나무'는 나이가 300살이 넘은 소나무이다. 특히 이 소나무 곁에는 비슷한 크기의 소나무가 서쪽에 한 그루 더 있는데, 서로 가지가 맞닿으면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긴다는 신비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안내자료에 따르면 지난 1945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이 되던 그 해, 좀처럼 가지가 맞닿지 않던 이 소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뻗어 푸르른 잎사귀를 서로 부볐다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소나무들의 가지가 다시 맞닿는 그날이 되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남북통일도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했던 '보릿고개'가 떠오르는 마을 성황리
지난 1월 30일(화) 오후 4시, 여행작가 김정수(36)와 함께 찾은 천연기념물 제359호로 지정된 의령 성황리 소나무. 성황리 마을 뒷산, 야트막한 산자락 비탈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성황리 소나무는 마치 애국가 2절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처럼 든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그날은 하늘이 더없이 푸르렀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소나무 사진이 제대로 나오려나 내심 걱정을 했지만 차가 의령에 들어서면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였다.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진초록빛 보리가 쑥쑥 자라고 있는 의령 들녘에서 가끔 불어오는 실바람도 새털처럼 부드럽고 포근했다.
성황리 마을 공터에 차를 세운다. 저만치 야트막한 산비탈에 우뚝 서서 짙푸른 하늘을 품고 있는 성황리 소나무를 향해 다가가자 갑자기 다랑이밭에 매어둔 서너 마리의 개들이 마구 짖으며 날뛰기 시작한다. 마치 그 개들이 지난 300여 년 동안 이 마을과 함께 살아온 성황리 소나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혹, 개줄이 풀릴 수도 있다 싶어 짱돌을 몇 개 주워 들고 산비탈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성황리 소나무 바로 아래 있는 마을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무너진 흙담과 이리저리 찌그러진 헛간, 벌겋게 녹이 슨 양철지붕과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슬레이트 지붕 등이 지난 60~70년대,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떠올리게 한다.
초록빛 솔잎이 와르르 쏟아지는 햇살을 튕겨 무지개를 빚는 소나무
마을을 지나 성황당 소나무가 뿌리 박고 있는 산비탈 앞에 다다르자 저만치 널찍한 잔디밭이 드러난다. 노오란 잔디가 곱게 깔린 산비탈 공터 북쪽에는 제법 큼직한 묘소가 두어 기 반원을 그린 채 봉긋하니 솟아 있다. 아마도 이 묘소는 마을 앞 산기슭에 있는 남씨 사당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하다.
성황리 소나무는 바로 그 반듯한 묘소 앞 비탈진 곳에 어깨를 한껏 벌린 채 우뚝 서 있다. 키가 13.5m에 이르는 이 소나무는 밑둥이 세 갈래로 갈라져 꼬불꼬불 기기묘묘하게 생긴 붉은 가지를 동서남북으로 뻗고 있다. 수령 300년, 밑둥 둘레 4.8m, 가지 밑둥 둘레 2.5m, 가지 길이 동서 20.8m, 남북 24m.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처음 이 소나무는 밑둥에서 1∼2.7m 높이에서 굵은 가지가 4개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굵은 가지 하나는 말라 죽어버리고(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음) 지금은 세 개만 남아 있다. 마치 붉은 용 세 마리가 용트림을 하며 마구 꿈틀거리는 듯한 꼬불꼬불한 가지 끝에는 솔잎이 초록빛 왕관처럼 씌워져 있다.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멋드러지게 뻗어나간 가지가 마구 꿈틀거린다. 언뜻 붉은 용의 몸뚱아리에 촘촘촘 붙은 붉은 비늘이 오소소 일어서며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듯하다. 더불어 그때마다 붉은 가지 끝에 용의 뿔처럼 돋아난 초록빛 솔잎이 와르르 쏟아지는 햇살을 튕겨 화려한 무지개빛을 톡톡 떨군다.
성황리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서낭나무
"히야! 이런 곳에 이렇게 웅장하고 멋드러진 소나무가 있다니…. 붉은 용 세 마리가 짙푸른 하늘을 향해 마악 날아가는 것 같지 않아?"
"의령에는 이 소나무 말고도 현고수 등 기기묘묘한 고목들이 꽤 많습니다. 유곡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이미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고, 백곡리 감나무도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고 있지요."
성황리 소나무 곁 서쪽에도 비록 천연기념물로는 지정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마치 성황당 소나무를 오매불망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아내처럼. 밑둥 둘레 2.7m인 이 미끈한 소나무가 바로 성황당 소나무 가지와 서로 맞닿으면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긴다는 짝퉁 소나무다.
근데, 나그네의 눈에는 분명 지금도 두 소나무가 서로 솔잎을 맞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소나무가 너무 웅장하고 큰 까닭에 나그네가 멀찌감치 서서 두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기에 행여 겹쳐서 보이는 것은 아닐까. 가까이 다가선다. 두 소나무의 솔잎은 서로 닿을락말락 안타까운 손짓을 하고 있다. 그래. 이 솔잎이 닿는 그날이면 남북통일이라도 되려나.
지난 3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이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서낭나무 역할을 하며, 이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의령 성황리 소나무. 그래. 이번 주말에는 봄이 깃들고 있는 의령 성황리로 가서 푸르른 솔잎을 더욱 푸르게 빛내고 있는 저 성황리 소나무를 가슴에 품으며, 저마다의 소원도 빌고 남북통일도 빌어보자.
☞가는 길/ 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부산 마산쪽 남해고속도로-의령 군북 나들목-의령 장례예식장-정곡-성황리 소나무 팻말-성황리 마을 뒷산-성황리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