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66세인 생일을 한남동 자택에서 쓸쓸하게 보냈다. 1월9일, 자신의 생일에 맞춰 진행된 ‘자랑스런 삼성인’ 시상식에도 지금까지 한 차례도 빠지지 않을 만큼 애착을 가져온 자리였지만 이마저도 불참했다. 이에 앞서 이 회장은 지난달 자신의 취임 20주년 기념행사를 생략한데 이어 연초 신년하례식도 취소했다. 지난해 ‘창조경영’을 주창한 것과 달리 올해는 이 회장의 신년사도 발표하지 않았다. ‘삼성 비자금 의혹’이 제기된 지난해 10월말부터 이 회장의 모든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셈이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반증으로 보고 있다. 생일 하루 뒤인 10일에는 ‘삼성특검’의 공식 업무가 시작되는 것만큼 이 회장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올해 생일은 이 회장 생애의 가장 최악의 날이 됐다.
취임 20주년 기념행사와 신년하례식 및 신년사 모두 취소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있었던 지난해 10월말부터 두문불출

특히 올해는 더욱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지난해 12월 취임 20주년을 맞이한데 이어 올 3월에는 그룹 창립 70주년을 바라보고 있어서다. 겹경사에 삼성그룹에서는 이 회장의 생일 잔칫상을 몇 달 전부터 준비해왔을 터였다. 하지만 올해 삼성그룹의 분위기는 잔칫집과 거리가 멀었다.
한남동 자택서 가족과‘조용히’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은 조촐하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된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28층 대회의실에서 이 회장을 대신해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시상을 맡았다. 지난해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자랑스런 삼성인상’은 이 회장이 자신의 생일 전후로 맞춰 시상식을 진행하고 직접 수상자에게 시상을 해왔다.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인 X파일 논란이 한창이던 2006년에도 정밀진단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 이 회장은 자신의 생일에 맞춰 귀국, ‘자랑스런 삼성인상’에도 참석해 한 해 동안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임직원들에게 격려하며 포상했다. 힘든 시기에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회장이 꼭 지키는 자리였던 것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호암아트홀에서 공개행사로 치르며 수상자와 수상자의 가족 등 6백여명이 참석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회장과 홍 관장이 함께 부부 동반으로 그룹 안팎의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횟수가 1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했을 때, 이 회장이 이 자리를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올해 시상식에는 이 회장이 불참하면서 수상자들에게 직접 시상을 해오던 전통이 깨지게 됐다. 이 회장은 이날 한남동 자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별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이 회장의 불참이 하루 앞둔 특검 조사 때문이라는 재계의 시각이 지배적이다.
덕분에 올해 수상자들 역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1직급 특진과 함께 5천만원의 상금을 받는 등 수상자들에게는 더 없이 기쁜 날이 돼야 하지만, 이 회장의 불참은 역시 타격이 컸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삼성맨들 역시 표정이 무겁고 침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뒤인 10일 ‘삼성특검’의 공식 업무가 시작되는 것만큼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다.
삼성그룹은 ‘자랑스런 삼성인’ 시상식에 앞서 신년하례식은 물론 이 회장의 신년사도 없었다. 올 한해 그룹이 집중해야 할 전략도,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룹의 전략 실현을 위해 매년 1월 둘째 주에 실시하던 정기 인사도 미뤄지고 있다.
삼성맨들은 지난해 잡혀있던 부나 팀 단위의 송년모임 및 신년모임이 취소됐고, 일요일에도 정상출근 하는 등 휴일 없이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비상사태인 셈이다.
게다가 ‘삼성 비자금 의혹’ 사태에 따른 실질적인 경영 타격이 조만간 수치로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삼성맨들의 한숨소리는 더 커졌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 여파가 반영된 4분기(10∼12월) 실적이 1월 중에 나오고, 특검 수사가 본격화되는 2008년 1분기(1∼3월) 실적은 4월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경영위기가 가시화되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회장은 그룹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칩거에 들어간 상태다. 김 변호사의 ‘폭로’가 있었던 지난해 10월말부터 두문불출로 사태 해결 방안에 대한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해 선친의 20주기 추모제에도 불참한데 이어 자신의 취임 20주년 기념행사까지 취소할 정도다. 이 회장의 모든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있었던 대외활동은 지난해 12월28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재계 총수 간 만남에 참석한 것이 전부다.
총수일가 소환 여부에 재계 촉각

특검의 수사 대상 사안은 비자금 조성 의혹, 정·관계 및 법조계 로비 의혹, 경영권 편법 승계, 2002년 대선자금 등으로 매우 민감할 뿐 아니라 광범위해 특검의 진행 양상에 따라 삼성그룹 수뇌부가 수사 대상이 될 확률이 높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회장과 삼성그룹의 차기 총수로 알려져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까지 소환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이 회장의 소환 여부에 촉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회장의 소환은 이 회장 개인으로서도 큰 불명예일 뿐 아니라 이 회장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징성을 감안할 때 삼성의 대내외적인 신뢰도에 미칠 타격은 불 보듯 번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명박 당선인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이는 ‘경제 살리기’는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삼성의 동참 없이 효과를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삼성그룹이 특검 돌파를 위해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로 조성되고 있는 친기업 환경 분위기에 기대를 걸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