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속의 단무지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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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장대송 두 번째 시집 <섬들이 놀다>

빈 벽에서 먼 바다의 섬들을 보았다
섬들이 놀고 있다
우울했다가 심심했다가 깔깔대다가 눈물 흘리다가
사는 게 노는 것이라고 했다
집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상여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즐겁게 노는 게 곧 비가 오려나보다
비 오면 떠날 듯한 사람이 그립다

('섬들이 놀다' 모두)

"내가 사는 동네에는 20여명 남짓 강어부가 산다. 범띠 동갑 노총각 어부와 늙은 벙어리 어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새벽 5시에 강에 나갔다가 오전 11시쯤 돌아온다. 매일 새벽 강 가운데 안개 계곡에 가서 무엇을 보고 듣고 오는지 항상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태어난 시인 장대송(41)이 고향에 대한 아픈 기억과 도시에서의 흔들리는 삶이 서로 콩깍지를 낀 채 경계의 눈초리를 빛내고 있는 두 번째 시집 <섬들이 놀다>(창작과비평사)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로 나눠져 있다. 표제작 '섬들이 놀다'를 포함한 52편의 시가 시인의 자아와 그 어떤 대상과의 힘겨운 길트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시들은 모두 어울리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멀어지고, 그렇게 아주 멀어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슬며시 다가선다.

애비는 축축한 불빛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다니는 불빛이다
그는 생전 듣지 못한 곡을 늘 부른다
어디서 그 노래들을 배우는 것일까
애비가 부르는 노래가 흔들린다
애비의 몸도 비틀댄다

몸이 흔들린다
정신이 흔들린다
흔들리다 일치되는 순간 나는 작물이다
어디에서 나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애비는 나를 들고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다시 태어나면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 모두

시인의 아버지는 대체 어떤 분이었을까. 어떤 분이었기에 시인의 눈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다니는" 축축한 불빛처럼 비쳤을까. 시인과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그 어떤 씻지 못할 과거사가 있었기에 스스로가 "어디에서 나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일까.

어린 날,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깊은 불화가 그대로 시인 자신에게 옮아왔기 때문이었을까. "갈대들이 조금에 뜬 달 아래서 외가에 간 어머니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던 곳"(고향)처럼 시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그 어떤 깊은 불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 없는 것 같다.

바다에 버려진 나무토막이
모래사장으로 떠밀려와서도
갯물을 먹은 그 몸이 좀체 마르지 않듯이
광대뼈, 저 광대뼈는
어떤 하세월을 품고 있어서, 오늘

병원을 나서며
허한 제 몸 하나 간수 못하면서도
고아원으로 들어가 일하겠다 할까

('누이의 광대뼈' 몇 토막)

광대뼈가 특 튀어나온 시인의 누이는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왜 고아원에 들어가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 대체 시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그 어떤 말 못 할 사연이 숨겨져 있기에 시인의 누이조차 "바다에 버려진 나무토막"처럼 도심으로 떠밀려왔을까. 그리고 "어떤 하세월을 품고 있어서" 그 사연을 숨기는 것일까.

대체 무슨 한 맺힌 사연이길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남겨진 것들" 을 새롭게 어루 "만지고 싶다"(해뜰날)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연이 얼마나 가슴 깊숙한 상처로 남아 있기에 "비오리의 박제된 시간들, 누가 가져왔을까?" 라고 반문하며 "아주 오래된 시간이"(박제된 비오리) 박제된 비오리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두 발 달린 짐승에게 정붙이지 말라고?
체온이 떨어진다고?
두 발 달린 짐승에게 몸대지 말라고?
상처투성이 된다고?

('그래서 뭐라고?' 모두)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두 발 달린 짐승"인 사람에게는 아예 정도 붙히지 말고, "두 발 달린 짐승"인 사람에게는 아예 몸도 부빌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근데 이 말은 시인의 어머니가 내뱉은 말이 아니었을까. 또한 '두 발 달린 짐승'은 혹여 시인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시인의 여러가지 이력을 들추어내며 이렇게 말한다. "'고향 상실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명확하지는 않다"라고. 그리고 "고향과 서울을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그 대립에 '점토성'과 '휘발성'의 대립이라는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고.

자장면 그릇을 씌운 비닐랩이 팽팽하다
수평선이다
단무지 그릇은 수평선이 답답하다
그릇 속의 단무지는 행복하다
랩 한가운데에 면도칼을 댄다

11층 아파트
빗소리를 듣기 위해 베란다에 가져다놓은 양철판 위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방송을 마친 모니터에서 빗소리가 난다
빗방울들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모니터에 면도칼을 댄다

('휴일' 모두)

그렇다. "자장면 그릇을 씌운" 팽팽한 비닐랩은 시인이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이자 두고온 고향이다. 또한 그 팽팽한 비닐랩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이며, 그 팽팽한 비닐랩이 언뜻 수평선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싫든 좋든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고향과 서울의 대립적인 이미지 속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또 한번의 대립을 시도한다. "수평선이 답답"한 단무지 그릇은 안면도에 살았던 과거의 나이다. 그릇 속의 단무지는 서울에 살고 있는 현재의 나이다. 그래. 답답함과 행복함 사이에 놓인 그 벽은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랩 한가운데에 면도칼을" 댐으로써 도심과 고향 사이를 팽팽하게 가로 막고 있었던 벽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그 거리가 스르르 좁혀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내리는 그 빗소리는 시인이 "방송을 마친 모니터에서"도 들린다. 그리고 그 빗소리는 마침내 고향의 물고기가 되어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무너뜨려도 또 하나의 거대한 벽이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모니터에 면도칼을" 대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리라.

테트리스를 한다 마포 삼성아파트와 현대아파트 사이에 생긴 공간을 메우자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원빌딩과 일진빌딩 사이에 길쭉하게 만들어진 공간을 채우려는데 통일건설 노동자와 일진알루미늄 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과 해고노동자 복직을 외치는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멈칫 컴퓨터 자판기의 포즈 키를 눌렀다 같은 복장에 같은 목소리, 같은 눈빛의 사람들……

다시 자판기 포즈 키를 풀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지친 날개짓의 황조롱이 길쭉한 공간을 맴돈다 또다시 자판기 포즈 키를 누르자 황조롱이는 황사에 덮힌 빌딩 벽에서 나온 상승기류에 몸을 내 맡기고 정지비행을 한다 평안하다 지칠 때마다 저 거대한 건물에 몸을 기대면 편안할까

('황조롱이 2' 모두)

시인은 "황사에 덮힌 빌딩 벽에서 나온 상승기류에 몸을 내 맡기고 정지비행을 " 하고 있는 황조롱이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시인은 지금도 도시와 자연, 서울과 고향, 나와 나를 둘러싼 대상 사이에서 저 황조롱이처럼 정지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끝없는 자아와 대상 사이의 지리한 싸움 속에서도 말이다.

시인 장대송의 두 번째 시집 <섬들이 놀다>는 도심과 고향 사이를, 나와 나를 둘러싼 대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 허물기다. 어느날 문득 도심으로 날아든 황조롱이가 도심의 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니며 정지비행을 하듯이, 시인은 오늘도 허상과 실상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정지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장대송만의 고유한 표정, 그것은 고향에 대한 갈망이 내장하고 있는 강렬성에 비해 고향에 대한 묘사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정과리, 문학평론가)

시인 장대송은 1962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태어나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초분'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3월, 첫 시집 <옛날 녹천으로 갔다>를 펴낸 바 있는 시인은 지금 <불교방송>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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