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새 벽오동에 깃든다
봉황새 벽오동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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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73호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

용신(龍神)이 바친 상서롭고 기이한 땅, 태안사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으니 '동리'(桐裏)라 하고 그 안에 집이 있으니 '대안'(大安)이라 했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에워싸 자취를 가리고 한줄기 물이 맑게 흘러 나갈 뿐이다. 길은 멀리로부터 끊어져 속세인이나 승려가 이르기 어렵고, 지경(地境)이 깊고 그윽하여 승려들이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용신(龍神)이 바친 상서롭고 기이한 땅이요, 벌레와 뱀이 그 독을 감춘 곳이다. 그리고 소나무 그늘에 구름이 깊어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이 따뜻하니, 이 곳이야말로 삼한의 승지(勝地)로다. 선사(혜철선사)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보더니 이곳에 있을 뜻을 두고 교화의 도량을 열었다."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 적힌 글' 몇 토막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국토서시)라고 부르짖던 <국토>의 시인 조태일(1041~1999)이 태어나 자란 태안사(泰安寺,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는 동리산(桐裏山, 봉두산의 옛이름)을 머리로 이고 북쪽으로 섬진강, 서쪽으로 보성강과 동계천, 동쪽으로 향진천을 거느리고 있다. 동리산은 '오동나무 품 안'이란 뜻이며, 봉두산은 '봉황의 머리'라는 뜻.

'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태안사 터는 봉황이 둥지로 돌아오는 형국(鳳凰歸巢形)의 땅이다. 관광안내자료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절과 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곳곳에 실제로 벽오동 나무가 꽤 많았으며, 지금도 봉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봉덕리(鳳德里)가, 동남쪽으로는 죽내리(竹內里)가, 서북쪽에는 동계리(桐溪里)가 있다. 게다가 이 절의 주소 또한 죽곡면(竹谷面)이 아닌가.

그랬으니, 예로부터 이 절 주변에는 '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는다'(鳳凰非梧桐不棲)는 벽오동 '동(桐)자가 붙은 이름과 '봉황은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鳳凰非竹實不食)'는 대나무 '죽(竹)'자가 붙은 이름이 흔한 것도 바로 이 풍수지리설에 따른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하긴, 나그네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스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풍수지리책을 들고 한반도 곳곳을 이 잡듯이 뒤지며 명당을 찾지 말고, 절터를 찾으면 된다, 예로부터 절이 있는 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라고. 그리고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산림을 훼손하거나 도로를 닦느라 그곳의 지형을 억지로 바꾸지 않으면 늘 편안한 곳이 곧 절이라 했다.

그 스님은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하는 곳은 특별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그 어떤 자리에 있을 때 몸과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지면 그곳이 곧 스스로에게는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스스로가 불편한 느낌을 받으면 스스로에게는 명당이 아니라는 것.


앞발 크게 벌리고 금세 달려들 듯한 돌거북 한 마리

지난 9일(토) 오후 3시. 정규화, 최순용 시인과 함께 찾았던 태안사. 그날 처음 만난 태안사는 나그네의 마음에 썩 드는 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어서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절이 자리잡고 있는 터는 고향의 품에 포옥 안긴 것처럼 참으로 포근하고 편안했으나 절집들이 꽤 어색하게 보였다는 그 말이다.

이는 아마도 이 절이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버린 뒤 새롭게 지은 까닭에 고풍스런 멋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태안사의 오솔길을 비틀고 흐르는 맑은 계곡과 주렁주렁 매달린 호두, 아름드리 기둥을 서있는 일주문, 일주문 옆에 있는 이끼 낀 부도탑들은 이곳이 풍수가 좋고 역사가 꽤 깊은 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특히, 대웅전 뒤에 있는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은 새로 지은 절집을 바라보며 허탈해하고 있는 나그네의 마음을 한순간에 쏘옥 빼앗아버렸다. 제법 널찍한 잔디밭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 부도탑을 보는 순간 그 부도탑이 나그네의 찜찜한 마음을 깨끗하게 치워버렸다고나 해야 할까.

게다가 부도탑 한 귀퉁이에 무거운 탑비를 등에 엎은 채 나그네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듯한 거북이 한 마리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부릅 뜬 두 눈은 용이요, 위로 툭 튀어올라 콧구멍 두 개가 훤히 보이는 납작힌 코는 돼지코에다 귀밑까지 쭉 찢어진 주둥이에는 누군가 일부러 입막음을 해놓은 듯했다. 그런데도 앞발을 크게 벌리고 나그네에게 금세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라니.

보물 제273호로 지정된 혜철선사의 부도탑

흔히, 부도탑이라고 하면 살아생전 수행이 아주 높았던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또한 부도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빼고는 대부분 절 들머리에 있다. 근데, 태안사의 부도탑은 신기하게도 일주문 안쪽에 여러 기가 있고, 대웅전 뒤쪽의 높다란 곳에 한 기가 더 있다.

태안사 대웅전 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처럼 우뚝 세워져 있는 이 독특한 돌탑이 바로 적인선사 혜철(惠哲)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다. 이름하여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 혜철 선사는 이곳 대안사(태안사의 옛 이름)에서 신라시대 대표적 선종사찰인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이산파를 처음 연 이름 높은 고승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73호로 지정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 부도탑이다. 3단의 기둥돌(基壇) 위에 몸돌(塔身)과 장식무늬가 있는 머릿돌을 올리고 있는 이 부도탑은 기둥돌이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랫돌과 가운데돌 그리고 윗돌이 그것.

그중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직한 사다리꼴 모습을 띠고 있으며, 각 면마다 사자상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가운데받침돌은 높이가 낮고, 각 면마다 가늘고 긴 안상(眼象, 탑의 밑부분의 돌에 연꽃잎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옆면으로 촘촘촘 솟아난 연꽃무늬를 새겼다.


대자대비한 불법을 가슴 깊숙이 품어보자

몸돌은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옆면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겨놓았으며, 지붕돌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처마 끝에 놓는 보통암키와나 수키와)를 예쁘게 표현했다. 그리고 추녀의 곡선은 물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각 귀퉁이는 파도가 치는 것처럼 위로 한껏 휘어져 있다.

부도탑 꼭대기 촘촘촘 솟아난 머리장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앙화(仰花, 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 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기둥돌과 몸돌에 새겨진 조각들과 어우러져 이 부도탑을 한층 더 멋들어지게 만든다.

이 부도탑 옆에 우뚝 서있는 비문에 따르면 적인선사 혜철 스님은 신라 원성왕 1년, 서기 785년에 태어나 경문왕 1년, 서기 861년에 입적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이 부도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그해에 곧바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태안사에는 이 돌탑 외에도 윤다의 부도탑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 지름이 92cm인 바라(보물 제956호)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주말에는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들어 대나무 열매를 따먹고 산다는 태안사로 가자. 가서 두손 모두어 연초록빛 이끼가 곱게 낀 부도탑을 천천히 돌며 대자대비한 불법을 가슴 깊숙이 품어보자.

☞가는 길/ 서울-호남고속도로-석곡 나들목-곡성읍-17번 국도-압록유원지(섬진강, 보성강이 만나는 곳)-18번 국도-태안교-태안사-보물 제273호 적인선사조륜청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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