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여- 후여어-"
어머니가 아까부터 마당에 서서 까마귀를 쫓고 있다. 밖거리 지붕 위로 날아와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깃에 묻은 눈을 떨어내려는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자리를 옮겨 앉았다. 까마귀는 눈 속에 깊이 묻혀서 머리와 꽁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준은 검게 물들인 군용 잠바를 두둑이 걸치고 마당으로 갔다. 이 잠바는 동문시장에 숯 팔러 갔을 때 인숙이가 골라 준 것이다. 그동안 낡고 빛이 바랬지만 그는 이걸 즐겨 입고 있었다.
"숯막 가크메 갈치꼴랭이 싸줍서."
"영 눈 오는디?"
"걱정 맙서, 잤당 올 거난."
-1권, 33~34쪽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4,3항쟁의 뿌리를 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시태(66, 한양대 명예교수)가 제주 4.3항쟁을 다룬 첫 장편소설 <연북정 1,2>(도서출판 선)를 펴냈다. 이번 소설의 특징은 작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 조천에서 일어난 4.3항쟁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낀 실제체험이 소롯이 녹아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작가가 4.3항쟁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 색다르다. 그는 4.3항쟁을 나름대로의 독특하고도 가슴 쓰린 체험으로 되짚어내면서 4.3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어지러운 마음에 촛점을 맞춘다. 그들은 왜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내던지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은 누구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내던졌는지...
'연북정'(戀北亭)은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포구 한 켠에 우뚝 서 있는 정자다. 이 자그마한 정자는 유배객들이 제주도의 유일한 관문인 조천포구로 드나들면서 임금에게 네 번 절을 하며 떠나가던 곳. 더불어 조천(朝天)이란 이름은 임금에게 조알한다는 뜻이며, 연북정의 '북'(北)과 조천의 '천'(天)은 곧 임금을 가리키는 글자다.
작가 김시태는 "예로부터 조천리 주민들은 지적 수준이 높았고, 반골정신이 강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일제 강점기 때에는 항일투쟁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1919년에는 이 마을 출신의 서울 유학생들이 동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되뇐다. 이 마을에 제주도 만세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만세동산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조천, 거기 무엇이 있어 나를 자꾸만 부르는 것일까
"나는 여태껏 조천이라는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조천 사람이고, 조천에서 늘 시작하고 있다. 거기 무엇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 것일까... 연북정과 만세동산은 조천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우리시대 처참했던 역사의 자취가 묻어 있다." -'작가의 말' 몇 토막
작가 김시태는 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연북정> 앞에 지난 12년 동안의 긴 세월을 바쳤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과 모르는 낯 선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 중에는 젊은 교사와 중학생들도 있었고, 40대 독립지사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작가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몸을 떨며 책상에 엎드려 흐느끼곤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기억, 그 가슴 쓰리고 아픈 기억들이 작가의 가슴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의문도 많았다. 어쩌다 그들이 우리들 곁에서 영영 떠나가버렸는지, 제삿날만 되면 왜 우리들 코흘리개들만 쓸쓸히 제삿상 앞을 지켜야 했는지, 세상이 입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몰랐다.
작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벙어리처럼 깊은 침묵 속에 살아야 했다"며, "소설을 쓰면서 고향으로 다시 찾아가보니 잡초만 우거졌던 만세동산에는 어느덧 기념비가 서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옛 사람들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고 말했다.
4.3항쟁에 뛰어든 조천중학원 학생들의 슬픈 이야기
"그는 다시 앉아서 써 나갔다. 마을 청년들이 경찰을 붙잡아 혼내주었다느니, 지서를 습격했다느니, 그래서 줄줄이 잡혀가 징역을 살고 있다느니 하는 얘기는 지금까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가 직접 목격한 두 마을의 사건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는 이 대목에 주목하고 싶었다. 분노와 통곡, 고함소리, 발밑에서 쨍그렁대던 삽과 곡괭이의 마찰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인민의 성난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잿골 사태에 이어 냉골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기록하고 나니 새벽 3시거 지났다. 그는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고꾸라져 잤다." -1권, 244~255쪽
이 소설은 작가의 고향인 조천에 있었던 고등교육기관 '조천중학원'을 주춧돌로 하여 '4.3항쟁'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슬픈 이야기다. 그때 조천중학원에 있었던 사람들은 서울이나 일본 유학생 출신의 교사들과 나이와 출신이 다른 학생들이 함께 모여 혁명과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딸인 '지인숙'과 해녀의 아들 '김현준'. 이 둘은 조천중학원에서 만나 양반과 천민이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는 연인 사이다. 하지만 그 둘이 살아가는 시대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미군정시대이자 이승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이루어지는 어지러운 시대다.
현준과 인숙의 아름다운 사랑도 4.3 앞에 물거품 되고...
"현준은 잠깐 잠이 들었었다. 눈을 떠 보니까 곁에 있어야 할 인숙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빈 집의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안 거리로 가서 기척을 보내자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여기 아무도 없습니까?"
"우리 족은년?"
"아,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