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모두
저무는 삼천포 앞바다에 서면 내가 보인다
저만치 수평선에 빨래처럼 걸려 있는 자잘한 섬들이 연분홍빛 노을에 포옥 젖어들고 있는 삼천포 앞바다. 그 바다에 서면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는다. 갈매기 서너 마리, 뉘엿뉘엿 지는 햇살을 물감으로 삼고 일렁이는 파도를 붓으로 삼아 아름다운 풍경을 콕콕콕 찍어나가고 있는 삼천포항. 그 항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서럽다.
노을 걸린 삼천포 앞바다에 서면 왜 울음이 나는 것일까. 노을에 포옥 젖은 삼천포항을 바라보면 왜 마음이 자꾸만 서러워지는 것일까. 벗도 한 명 없이 홀로 해 지는 남녘바다에 쓸쓸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일까. 소주도 한 병 없이 파도에 힘겹게 삐걱 이고 있는 저 고깃배들이 나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지금도 수평선 너머 깊은 바다에서 뛰노는 오징어와 고등어, 멸치떼가 그리운 듯 노을에 집어등을 반짝 반짝 빛내고 있는 고깃배들. 만선을 약속하는 대나무가 제 홀로 노을 지는 하늘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고깃배 위에 그 대나무처럼 홀로 서서 저무는 바다를 오래 바라보며 말없이 서성이고 있는 어부 한 사람.
울음과 서러움도 잠깐. 발길을 돌려 삼천포항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어시장에 들어서면 거기 수평선을 쥐고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가 싱싱한 물고기 되어 힘차게 퍼덕이고 있다. 해 지는 삼천포 앞바다와 고깃배가 묶인 삼천포항이 나그네에게 울음과 서러움을 주었다면 삼천포항 어시장은 왁자지껄 사람 사는 내음을 맡게 해준다.
쫄깃하면서도 감칠맛이 좋아 전국에서 입소문이 난 활어
지난 4일(일) 오후 6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자란 시인 박재삼(1933~1997)의 시에 나오는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처럼, 나그네는 세상의 슬픔을 나눌 만한 살가운 벗이 곁에 없어 홀로 삼천포 앞바다에 섰다. 그 바다에 서면 이 세상의 슬픔이 파도로 잘게 쪼개질 것이라 여기며.
첫사랑의 입술 같은 노을에 흠뻑 젖고 있는 삼천포항. 삼천포항은 서부 경남 연안의 어업 중심지다. 165㎞에 이르는 긴 해안선을 따라 47개의 크고 작은 항구를 거느리고 있는 이 항구에는 2천여 척이 넘는 고깃배가 밤마다 쉬임없이 수평선을 넘나들며 싱싱한 멸치와 갈치, 전어, 고등어 등을 건져올리고 있다.
한때 삼천포시였다가 지금은 사천군과 합쳐진 사천시의 가장 큰 항구로 탈바꿈한 삼천포항 앞바다는 물흐름이 잔잔하고 플랑크톤이 풍부해 수많은 물고기가 몰려 사는 깨끗한 바다이자 수산물의 보물창고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잡히는 활어는 싱싱하고 쫄깃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좋아 전국에서도 사람들의 입 도마에 자주 오르고 있다.
한려수도의 기항지(배가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이자 수출을 위한 바닷길을 열고 있는 삼천포항. 삼천포항은 1958년 일본 수출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선어(鮮魚) 수출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66년 4월 16일에는 국제적인 무역항이 되었다. 이 항구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선어와 유류, 시멘트, 철재, 광석, 소금류 등.
"요새 도다리가 향긋한 기 제 맛이 들었어예"
그날, 노을에 아름답게 물든 삼천포항 앞바다와 부둣가에 묶인 고깃배들을 뒤로 한 채 부두를 따라 쭈욱 늘어선 어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나그네. 거기 살아 꿈틀대는 오징어와 도다리, 낙지, 전복, 해삼, 멍게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활어들과 김, 파래, 마른 멸치, 마른 명태 등 해산물이 길가에 즐비하게 놓여 있다.
"요거 2만 원만 주이소, 요새 도다리가 향긋한 기 제맛이 들었어예"하며 팔딱거리는 도다리를 한껏 치켜들고 나그네를 잡아끄는 아낙네, "남자들한테는 낙지 이기 최곱니더", "산 오징어 5마리 만 원" 등등, 여기저기서 나그네를 잡아끄는 아낙네들의 거센 경상도 말투에서 항구를 논밭으로 삼아 힘겹게 살아가는 어민들의 억센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낙네들의 손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삼천포항 어시장 여기 저기 놓인 싱싱한 물고기를 바라보자 갑자기 생선회에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나그네가 나무빛 대야 안에 납작 붙어있는 도다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한 아낙네가 허리를 쿡 찌른다. 아낙네 왈 "이거 몽땅 만오천 원만 주이소, 조기(저기) 보이는 저 집으로 가이소" 한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게다가 어스름이 더 깔리기 전에 서둘러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차를 타야 한다. 아낙네에게 "시간이 늦어서... 다음에 꼬옥 이 집에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어시장을 빠져나와 다시 삼천포항에 선다. 아까 보았던 연분홍빛 노을이 어느새 동백꽃빛 노을로 변해 고깃배들을 어스름 속으로 천천히 밀어 넣고 있다.
홀로 솟아난 대나무 하나만이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나부끼는 부둣가
삼백리 한려수도의 배꼽에 자리 잡고 있는 삼천포항 앞바다. 저만치 섬과 섬들을 잇고 있는 창선·삼천포대교가 알록달록한 빛을 서서히 뿜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천포항에 빼곡히 묶여 있는 고깃배에는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노을이 어스름에 빠지고 있는 하늘을 향해 홀로 솟아난 대나무만이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나부끼고 있다.
어둑한 부둣가 저 편에는 어부 몇 사람 쪼그리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다. 담배를 거세게 빨아들일 때마다 빠알간 담뱃불에 은근슬쩍 비치는 어부의 붉은 얼굴이 세상사 시름을 몽땅 쫓아내고 있는 듯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고깃배에 매달린 집어등이 어부를 바라보며 어서 바다로 가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검붉은 노을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어느 어부의 목숨처럼 천천히 꺼지고 있는 삼천포항. 삼천포항에 묶인 저 고깃배는 언제 희망의 긴 뱃고동소리를 울리며 어둔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것인가. 그리고 언제쯤이면 바다로 나간 고깃배들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갈매기떼를 몰고 돌아올 것인가.
이윽고 어둠이 자욱하게 깔리는 삼천포항 앞바다에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깔리기 시작한다. 불빛들이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무지갯빛 춤을 너울너울 추기 시작할 무렵, 고깃배들이 희미한 불빛을 한 점 또 한 점 밝히기 시작한다. 부둣가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던 어부들도 느긋이 고깃배에 오르기 시작한다.
힘들고 고달플 때는 저무는 삼천포항 앞바다에 서보라
하지만 금방 출항할 듯한 고깃배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그네가 이 자리를 떠나야만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는가 보다. 부둣가에 꽁꽁 묶인 고깃배가 출항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제 출항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 저 어부들에게 만선을 하라는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할 시각이다.
그래. 이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달플 때는 저무는 삼천포항 앞바다에 서보라. 거기 서서 바다를 논밭으로 삼아 굳세게 살아가는 어민들의 거친 삶과 어부들의 안녕과 만선을 기원하는 대나무를 꽂은 고깃배, 그 고깃배에 어부들의 희망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집어등를 속내 깊게 들여다보라. 도시의 삶 또한 저 바다에 몸을 맡긴 어민들의 삶과 무에 다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