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이, 이별하며 설워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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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심영구 기생 에세이 <조선 기생 이야기> 1

"서정의 극치는 누가 뭐래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순결무구한 애정이요, 정감의 표현은 뭐니뭐니 해도 사랑을 노래한 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애정시는 사랑의 꽃이다. 남녀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애정의 시편을 감상하노라면 가슴이 뛰고 황홀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오랫동안 교직에 종사하면서, 주로 우리의 전통과 생활문화에 관련된 수필을 묵직한 사상과 재치 있는 기교 속에 담아온 수필가 심영구(68)가 기생 에세이 <조선 기생 이야기>(미래문화사)를 펴냈다.

'기창시화'(妓窓詩話)란 소제가 붙은 이 책은 조선시대 3대 시기(詩妓)였던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이매창, 성천의 김부용을 비롯한 의기 논개, 일송 심희수를 정승에 올려준 일타홍 등 조선시대 명기 30여 명이 당시의 사대부, 선비들과 시를 읊조리며 나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기생 개개인의 개성과, 지역적 특성, 특기까지 해학적인 필치로 조명하고 있는 <조선 기생 이야기>는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명기의 조건', 제2부 '명기만이 명기를 안다', 제3부 '눈물로 엮은 시편', 제4부 '기생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사연', 제5부 '여장부 기녀들', 제6부 '기생으로 정승도 되고 패가망신도 하고'

1. 장목려안(長目麗眼):눈매가 길되 고와야 하고,
2. 고비복두(高鼻福頭):콧날이 오독하고 콧망울이 복스러워야 하고,
3. 피윤옥골(皮潤玉骨):살결이 윤택하고 귀골이어야 한다.
4. 견부반원(肩部半圓):어깨는 둥글어야 하며,
5. 유두홍흑(乳頭紅黑):젖꼭지가 검붉고,
6. 둔부광구(臀部廣球):엉덩이는 둥글되 펑퍼짐할 것이며,
7. 운발비황(雲髮非黃):머리가 구름 같고, 검되, 노랑머리가 아니어야 한다.
8. 수족비대(手足非大):손과 발이 커서는 안되고,
9. 체격비거(體格非巨):몸체가 거구여서는 안되며,
10. 신장비이(身長非異):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야 한다.

요즈음은 양풍(洋風)으로 노란 물을 들이고, 쌍거풀 시술에, 콧구멍을 좁히고, 광대뼈를 깎아낸다. 이빨을 염색할 뿐만 아니라, 아예 위아랫니를 몽땅 뽑아내고 틀니를 한다. 심지어 허벅지나 뱃살을 도려내는 것도 예사가 되었다. 이러느라 생명을 잃거나 부작용으로 흉한 몰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전쟁이요, 필사적인 과제다.

('명기의 조건' 몇 토막)

저자는 우리의 전통적 미녀의 기준이 여상십구(女相十俱)였다며,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서양이나 중국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예나 지금이나 마치 전쟁처럼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결국 아름다운 사랑을 얻으려 몸부림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선비와 기생의 애달픈 사랑을 통해 훑는다.

예쁘게 태어났네, 선녀로구나.
사귄 지 십년이니 속내 모르랴.
나라고 목석 같은 사내이련만
병들고 늙었기에 사절함이랴.
정든 이, 이별하며 설워한다만
우리는 얼굴만 친했을 뿐,
다시 태어나면 뜻대로 이루리라.
온갖 정욕 삭아진 병든 몸이라
가련코녀 길가에 버린 꽃,

(율곡 이이 '유지사' 몇 토막)

유지는 선비의 딸로 태어나 미모가 출중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기적(妓籍)에 올라 율곡의 심부름을 하는 관기가 되는 여인이다. '유지에게 준 율곡의 연서'에 나오는 이 시는 지금도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는 율곡 이이가 끔찍이 사랑했던 어린 기녀 '유지'를 다독이며 쓴 시다.

하지만 율곡은 유지를 10여 년 동안이나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육체적인 관계를 한번도 맺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율곡은 이미 "온갖 정욕이 삭아진 병든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지에게 시를 지어 보내면서 "가련코녀 길가에 버린 꽃"이라고 했을까.

이처럼 사대부와 선비들의 여인에 대한 지극하고도 끔찍한 사랑도 실은 그 여인의 눈 부시도록 곱게 빛나는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만약 그 아름다운 외모가 없었다면 한 여인이 아무리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발랐다 하더라도 사대부와 선비들이 그 여인을 그토록 마음 깊이 사랑할 수가 있었겠는가.

순조 시절, '가련'이라고 하는 함흥 태생의 기생이 있었다. 하고많은 아름답고 예쁜 이름을 두고 하필이면 가련이라 붙였으니, 그 이름대로 외롭고 불쌍하고 슬픈 운명이 그녀의 몫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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