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사리기, 百濟史를 다시 쓰다
왕흥사지 사리기, 百濟史를 다시 쓰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제학술대회 및 특별전 개최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7년 10월 공개하여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부여 왕흥사 목탑터와 사리기에 대하여 국내외 관련학자들이 심도 있게 토론하는 학술대회(주제: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의 意味)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특별전 '백제 왕흥사'를 개최하여 사리장엄구를 발표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술대회는 이기동 동국대교수의 기조강연을 필두로 발굴조사 성과에 대해 보고한 후 사리기, 사리공양품에 대하여 분석하고, 백제사ㆍ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본 후, 복원 정비 문제까지도 다룰 예정이다.

가장 주목되는 사리용기(원통형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중 청동제사리합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6세기경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되었으며, 금제사리병이 사용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 확인되었는데 중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 주목되는 것으로 아직 유리용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금제용기가 내사리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보고 있다.

심초석 사리공 주변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에 대해서는 진단구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번 발표에서는 사리장엄구와 공통되는 공양품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이한상 대전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이 공양품은 절대연대를 가진 일괄 유물로 사비시기 백제문물의 편년작업에 중요한 기준자료가 될 것이며 아울러 제작지 논란이 있었던 부여 능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등이 백제 장인들이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의 지속성과 우수성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목탑과 사리기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왕흥사 목탑 기단의 구축 기술 및 사리용기ㆍ장엄구 안치 형식을 살핀 일본 동북학원대학의 사가와 마사토시(佐川政敏) 교수는 중국 남북조 및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지적하였다. 6세기말∼7세기대의 일본 목탑과는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는 점과 사리장엄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된 공양품의 구성에서 매우 유사한데 이런 장엄구는 중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중국 남북조의 영향도 살필 수 있는데 심초석에 사리공을 마련하고 지붕모양의 돌 뚜껑을 덮은 것은 북조∼수시대에 보이는 사리석함이 이미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심초석을 파고 마련한 구멍에 사리용기를 봉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양홍(楊泓) 연구원이나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과장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원통형 청동제사리합 외면의 명문은 새긴 것이 아니라 도자를 사용하여 쓴 것이고 명문 서체는 중국 남북조의 서사문화가 혼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손환일 경기대학교 교수의 지적도 왕흥사 사리기의 이러한 국제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사리안치시설을 마련한 석재를 심초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별도로 지상에 심초석이 마련되었는지 등 목탑기단부의 구축과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원통형 청동제사리합의 명문과 관련하여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왕흥사지 사리기 명문' 분석을 통해 본 백제 위덕왕대 정치와 불교」라는 발표문에서 '亡王子'가 아니라 '三王子'를 위해서, 절이 아니라 '위덕왕 발원탑' 혹은 '위덕왕 3왕자 추복탑'이라고 할 만한 탑만을 먼저 세워 목탑과 왕흥사 창건은 당초 연계성 있는 가람 배치 구도 속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왕흥사지에 대한 추가 조사로 논의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기동 동국대학교 교수는 왕흥사지 사리장엄구는 위덕왕이 부왕(성왕)과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짓고 목탑 밑에 사리를 봉안하는 장치를 만드는 등 불사리신앙을 고취함으로써 불교적 신성 왕권의 상징적 효과를 기대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 있는 자료로 이 시대의 정치와 제의를 살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이도학 교수는 위덕왕계 왕실은 불사리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분여(分與)를 통해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고취시킴으로써 국왕의 위상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