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 한 귀퉁이나 중국집에 모여 시 토론
다방 한 귀퉁이나 중국집에 모여 시 토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 추억 속의 그 ‘공장일기’

나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윤슬문학동인회" 회원이 되어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들은 강신형, 김명희, 박영주, 우무석, 유영국, 임정애다. 우리들은 그 모임의 결실로 <윤슬>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후 이 모임의 이름은 정진업 시인의 조언으로 "사향문학동인회"로 바뀌었다.

당시 활약했던 이들 중 대부분은 현재 시인 또는 문예활동가가 되어 이 지역 문학운동의 핵심이 되어 있다. 그중 박영주는 연극을 하다가 문예활동가가 되어 있고, 임정애는 지금까지도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박영주는 사십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매주 또는 격주에 한번씩 다방 한 귀퉁이나 중국집에 모여 창작한 시를 서로 읽고 돌려가며 평가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늘상 뭔가가 부족하고 허전했다. 왜냐하면 나의 처절하다시피한 공장생활과 우리 구성원들이 창작한 시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시가 이런 것이 아닌데, 라는 막연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게다가 이선관 선생의 시와 월북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더욱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 허전함과 부족감을 달래기 위해 공장 게시판에다 "시심"(詩心)이란 이름을 내걸고 문학지망생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낼 때 정말 힘들었다. 당시 총무과에서는 형사가 살인사건 조사를 하듯이 모집공고를 내고자 하는 배경에서부터 목적, 활동인원, 사업계획 등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충 교과서식으로 둘러대었다. 어둡고 침침한 작업현장에 시의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그러한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창원공단이 생긴 이래 최초로 "시심문학동인회"라는 사내 문학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 때 가장 큰 도움과 격려를 해주신 분이 공작부에 근무하던 황복현 선생(당시 과장)이었다. 시를 아주 잘 썼던 황복현 선생은 공장 안에서도 내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 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