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듬해, 그러니까 1979년에 접어들면서 나는 사내 문학모임에는 한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 틀을 과감히 깨버리기로 했다. 사실, 이때 내가 공장에 근무하면서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고 총무과와 타협했더라면 나는 그 공장에서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소박한 양심이자 한계였다.
그때부터 나는 창원공단을 대표하는 공단문학의 모임을 만들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장에는 문학모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억지로 끌어모아야만 했다. 그리고 기존의 "시심문학동인회"는 사내모임으로 남기면서 창원공단 내 사내문학모임의 단체인 "남천문학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남천문학회"는 처음에는 많은 참여가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자꾸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단체의 목적이나 활동계획이 불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지역을 더욱 넓혀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갯물(경남대학 문학모임), 갯벌(수출자유지역 문학모임), 사향(마산시내 고교 문예반 졸업생 모임), 개나리(경남여상 문학모임, 황선하 시인 지도)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연대행사를 개최했다.
나는 그렇게 공장생활 1년을 보내고 2년째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묘한 허전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내 가슴을 회오리바람처럼 그렇게 휑하니 빠져나가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그해 10월부터 꼬투리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봄에 접어들면서 곧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