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에서 8시 출발, 시속 60km의 쾌속정으로 2시간이 걸리는 흑산도. 숙소에다 짐을 풀지 못하고 바로 찾아간 손암의 유배지, 사리(沙里)마을을 찾았습니다.
“손암은 바다 가운데로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며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의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여 서로 싸우기까지 하며 자기 집에만 있어달라고 원했다.
그러는 동안 우이도(牛耳島)에서 흑산도로 들어가 사셨는데 약용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차마 내 아우로 하여금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마땅히 우이도에 나가서 기다려야 되지’라고 말하고는 우이도로 돌아가려 했으나 흑산도 사람들이 놓아주지 않아 몰래 도망쳐 나오다 들켜서는 다시 붙잡혀 갔으며 다시 사정하여 겨우 우이도로 와서 3년이나 기다렸으나 약용이 해배되지 못하자 마침내 아우를 만나보지 못하는 한을 품은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돌아가신 뒤 2년이 지나서야 내가 겨우 율정(栗亭)의 길목을 경유하여 돌아올 수 있었으니(1818)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것이 이와 같았었다.”(先仲氏墓誌銘)
우리 일행은 흑산도 사리마을의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고 복원된 초가집 마루에 앉아서 다산의 글들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것이 이와 같았다(惡人之積不善如是矣).” 얼마나 형님의 죽음이 안타까웁고 애석했으며 그분이 당하던 고통에 마음이 저렸으면 그런 독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인지, 그 대목에서 우리 53명의 실학기행단 모두가 숙연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불행, 그만한 고통도 이겨내고 천추에 명저로 남을 『현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한 손암 정약전이라는 위대한 실학자를 생각하면서 우리 일행은 손암의 한이 서린 흑산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강진의 다산초당과 해남의 녹우당을 거쳐 17일 밤 늦어서야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강행군을 잘 마친 참가자들의 열성에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경기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이번 기행이 이루어졌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