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교시 / 1반부터 18반 곱하기 2개 학년 / 각 층마다 1열로 늘어서서 표찰을 붙인 / 각 교실에 1,200명 학생들 들어 앉아 / 똑같이 손가락으로 볼펜 돌리며 / 다리 떨며 / 기말고사 보느라 진땀을 흘리는데 / 학교가 온통 쥐죽은 듯 조용한데 / 그때 잠깐 내다본 / 3층, 100미터도 넘는 긴 복도 / 끝도 안보이는 복도 중간쯤 / 비둘기 두 마리 사랑을 나누고 있다 // 수놈은 암놈 등 뒤에 올라타 / 꽁지를 옆으로 살짝 돌리며 콩콩콩 / 잠깐 사랑을 나누고 내려와 / 두 놈이 아무일 없는 듯 / 아장아장 다정하게 복도를 걸어간다 / 거참, 거참 / 잠깐을 눈부신 그 적막 속에 / 밑도 끝도 없는 저 사랑을 / 아무 표찰도 시험도 없는 저 사랑을 / 나는 아이들에게 /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 「비둘기와 중간고사」 전부
시인은 중간고사 감독을 하면서 아무표찰도 시험도 없는 사랑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바라봄은 선생으로서 저 사랑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내면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 가운데에서 평등한 사랑을 발견하는 시인의 마음이 읽혀지는 시다.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 ‘능소화’를 어떻게 표제로 정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적 영성과 시 세계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능소화는 그 붉은 아름다움과 함께 잘못 접촉하면 눈병을 앓는 독성이 함께 있다고 한다. 어쩌면 꽃은 있는 그대로도 경이로운지 모른다.
어둠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루 언제부턴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
- 「능소화」 전문
딱히 능소화가 아니라도 꽃은 그냥 보여 주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생존의 이유를 가지고 피어나는 것이다. 어느 인생이든지 그 삶에 상처만큼 짙은 향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향기는 오래도록 다른 이의 위안이 되고 싶은 법이다. 지금 사는 세상이 칠흑 같을 지라도 웃음과 울음의 끝에 환히 피어오르는 시, ‘욕심 없음의 욕심’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무위자연의 시편들이다.